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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 - 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

저자
장진성  저
  • 가격

    35 원

  • 출간일

    2020년 04월 28일

  • 쪽수

    484

  • 판형

    173*239

  • ISBN

    9791189946562

  • 구매처 링크

요약

 

조선 후기 대표 화가 김홍도는 단원풍속화첩(보물 제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인해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낸 ‘풍속화가’로 널리 알려져 왔다. 이 화첩은 김홍도가 이룩한 화가로서의 업적을 한국적 풍속화가라는 범주 안에 가두어버리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김홍도는 풍속화만 잘 그린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풍속화뿐 아니라 산수화, 도교 및 불교 관련 그림인 도석화, 화조화, 인물화 등 모든 그림 장르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한 조선 후기 최고의 화가였다.

이 책은 김홍도의 생애와 작품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고찰함으로써 가장 조선(한국)적인 풍속화가라는 대중적 통념에서 벗어나 역사적 진실 그대로의 김홍도를 복원한다. 특히 군선도, 행려풍속도, 해산도병, 삼공불환도 등 김홍도의 화가로서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병풍화’를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자세히 분석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문헌 자료를 통해 도화서 의 실력 있는 화가를 넘어 정조의 총애를 받은 ‘왕의 화가’ 김홍도와 그의 ‘자아의 영역’에 대한 심도 있는 접근을 시도한다. 아울러 동시대 중국과 일본의 화단을 비교함으로써 김홍도가 18세기 동아시아 화단의 독보적인 천재 화가였음을 밀도 있게 재조명하였다.

 

병풍화의 거장, 김홍도의 진면목을 만나다

― 풍속화가라는 대중적 오해와 통념을 넘어 마주한 역사적 진실

김홍도의 생애는 다른 조선시대 화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저자는 많지 않은 문헌 기록들을 토대로 그의 생애와 작품의 제작연도 및 해당 작품에 대한 당대의 평가 등을 촘촘히 복원해냈다. 특히 어린 시절 인연을 맺은 강세황이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김홍도의 그림 스승이 아니었으며, ‘단원’이라는 호에 관한 당대 기록을 통해 그가 안산에서 살았다는 설의 허구성을 밝혀냈다. 또한, 혈연적 유대감이 강한 다른 도화서 화원 집안과 달리 중인 무관의 집안임에도 타고난 천재적 재능과 노력을 통해 10대 후반 도화서 화원이 되었으며, 20대 말에 영조의 어진과 왕세손(후일의 정조)의 초상화, 그리고 의궤를 제작하는 등 도화서의 실력파 화가로 성장한 과정을 재구성해 들려준다(1-2장 참조).

그렇다면 이 책은 단원풍속화첩으로 인해 만들어진 풍속화가라는 김홍도에 대한 대중적 통념을 어떻게 전복했을까? 저자는 김홍도의 화가로서의 진면목은 그의 ‘병풍화’를 통해 살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병풍은 스케일과 화면 구성, 세부 표현에 있어 화첩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크기 때문이며, 김홍도가 새로운 구도와 기법을 실험하고 남긴 명작 대부분이 ‘병풍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김홍도 나이 32세 때 그려진 군선도(1776)를 비롯해 다양하게 그려진 그의 병풍화에 주목한다. 속필을 통한 시원한 필선과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군선도, 강세황이 주목한 ‘완연히 눈앞에 펼쳐진 삶의 현장’이 사실적으로 구현된 행려풍속도(1778)에 대한 저자의 치밀한 작품 분석은 김홍도가 왜 병풍화의 대가인지를 깨닫게 한다. 더불어 이 책은 문인들의 이상적인 모임을 그린 서원아집도(1778), 그림으로 인생을 표현해낸 모당평생도(1781), 금강산 그림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해산도병(1788), 정조에게 마지막으로 바친 주부자시의도(1800), 현존하는 김홍도의 마지막 병풍인 삼공불환도(1801) 등 김홍도의 생애와 함께해온 주요 병풍도를 집중 조명함으로써 천재 화가 김홍도의 다양한 작품세계뿐 아니라 그의 내면세계까지 온전히 복원하고 있다(3-4장 참조).

‘왕의 화가’ 김홍도의 빛과 그림자

― 정조의 총애를 받은 국중 최고 화원 VS 중인 출신 화가의 시대적 한계

이 책은 특히 김홍도와 정조의 관계에 주목한다. 김홍도가 당대 최고의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조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세손 시절 처음 초상화를 그리면서 맺어진 이 둘의 인연은 정조의 재위 기간(1776~1800) 내내 이어졌다. 즉위 이후 정조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규장각을 김홍도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하는 등 궁중의 모든 그림 관련 일을 맡겼다. 이외에도 정조의 명을 받은 김홍도는 금강산과 영동 지역을 직접 방문하고 실경산수화를 제작했으며(1788), 대마도로 건너가 지도를 그려왔다고도 전한다. 이후 정조의 화성원행(1795), 화성 건설(1796년 완성)과 관련된 그림 작업을 총괄하였다(5-6장 참조).

정조가 김홍도에게 궁중의 모든 그림 관련 일을 맡긴 것은 단순히 그의 그림 실력에 대한 믿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홍도의 높은 지적인 능력과 문학적 소양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 책은 김홍도가 정조에게 바친 주부자시의도 등의 그림을 통해 이를 논증하고 있다. 저자는 특히 김홍도에 대한 정조의 절대적 신뢰와 총애를 자비대령화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1783년 11월 21일에 시작된 자비대령화원은 도화서 화원 중 유능한 자 10명을 선발해 시험을 치러 녹봉직을 주는 제도였는데, 정조 치세 내내 김홍도는 자비대령화원으로 뽑히지 않았고 녹취재도 보지 않은 아주 특별한 열외 화원이었다.

그러나 ‘왕의 화가’이자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그 또한 여타의 중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무시와 차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50대 전반에 사용한 ‘천생아재필유용(天生我才必有用: 하늘이 나에게 재주를 주었으니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이다)’은 자신의 능력이 제대로 쓰이지 못한 현실에 대한 한탄을 담고 있다(7장 참조). 김홍도의 말년은 더욱 쓸쓸했다. 정조 사후 자비대령화원으로 생애 처음 뽑힌 김홍도는 1804년 60세의 나이에 다른 화원들과 녹취재를 볼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 병을 얻어 1806년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정조와 김홍도의 그림으로 맺어진 인연을 통해 ‘왕의 화가’로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화가 김홍도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들려준다.

18세기 동아시아 화단의 독보적인 천재 화가

― 거시적 시각의 비교분석을 통한 김홍도의 재발견

김홍도의 화가로서의 위대함은 다른 여타의 책에서도 다루어졌지만, 이 책은 특히 18세기 동아시아 화단 전체의 맥락에서 김홍도의 화가로서의 위상을 살펴보고 있다. 18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김홍도를 능가하는 화가가 없었으며, 아울러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뛰어난 화가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는 건륭제가 남송 이후 사라졌던 화원(畵院, painting academy)을 부활시킴으로써 뛰어난 화가를 다수 배출했지만 1770년대 중반 황실호위병 화신이 혜성처럼 나타나 건륭제를 등에 업고 실권을 잡자 급속히 몰락하였다. 이후 중국에서는 뛰어난 화가가 나타나지 않아 중국 화단은 암흑 속으로 사라진다. 특히 건륭제 시대를 대표하는 궁정화가인 서양이 1776년 무렵 역사에서 퇴장하는데, 이때 바로 조선에서는 정조가 등극하고 김홍도가 군선도를 그리면서 그림의 절대 강자로 급부상한다. 김홍도의 라이벌은 일본에도 있었지만 이들의 화풍은 다양하지 못했고 자신들이 잘하는 그림에만 재능을 보이는 한계를 지녔다. 이와 달리 김홍도는 그림의 모든 장르에서 걸출한 능력을 발휘한 거의 유일한 화가였다. 이 책은 조선이라는 일국적 시각을 넘어 18세기 동아시아 화단을 거시적 시각으로 비교분석함으로써 김홍도가 풍속화가로만 국한될 수 없을 만큼 18세기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 화단 전체에서 가장 탁월한 화가였음을 세밀하게 논증하고 있다(8장 참조).

 

책 속에서

이 책을 준비하면서 가장 고심했던 사항은 단원풍속화첩 속의 서당, 씨름, 대장간 그림의 작가로만 김홍도를 인식하고 있는 대중들의 그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대중적 오해와 통념은 사실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 단원풍속화첩의 그림들은 신문, 잡지, 방송 등 대중매체뿐 아니라 농산물 광고, 민속 관련 행사를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심지어 민속주점, 한식당, 관광호텔의 내부 장식용 이미지로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중략) 그 결과 단원풍속화첩은 ‘김홍도는 풍속화가’라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대중에게 심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김홍도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고 그의 진정한 모습을 알리기 위해 쓰였다. ― 6쪽, 머리말 중에서

 

단원풍속화첩은 일반 대중에게 김홍도를 한국적인 풍속화의 대가로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또한 이 화첩의 지나친 대중성은 김홍도가 이룩한 화가로서의 업적을 한국적 풍속화라는 범주 안에 가두어버리는 부정적인 역할도 하였다. 즉, 단원풍속화첩은 김홍도에 대한 대중적 오해의 근원이기도 했다. (중략) 김홍도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 연구의 주류적 시각인 ‘가장 조선(한국)적인 화가’라는 인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먼저 김홍도의 생애를 보다 객관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 13~15쪽, 프롤로그 중에서

 

단원이라는 호와 관련해서 강세황은 명백하게 「단원기우일본」에서 김홍도가 명나라 말기의 문인인 이유방(李流芳, 1575~1629)의 인품을 사모해 그의 호인 단원을 따랐다고 했다. 즉, 단원은 안산의 지명과 관련된 호가 아니다. 단구는 도교적 인 호로 ‘신선이 사는 곳’을 의미한다. 단구 또한 안산의 지명

과는 그 어떤 연관성도 없다. ― 33~34쪽, 1장 ‘김홍도는 누구인가’ 중에서

이용휴도 김홍도의 정교한 묘사력과 화려한 채색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는 “김군 사능은 스승이 없이도 지혜로써 새로운 뜻을 창출하고, 그 붓이 간 곳에는 신이 모두 함께 하니 그 푸른빛, 황금빛으로 섬세하게 그린 터럭이나 붉은색, 흰색으로 묘사한 비단은 모두 정교(精巧), 묘려(妙麗)하여 옛사람이 보지 못함이 나의 한이다”라고 김홍도의 뛰어난 그림 솜씨를 극찬했다. (중략) 정교와 묘려는 모두 김홍도가 정교하고 치밀한 묘사력과 뛰어난 채색 능력을 지닌 걸출한 화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 52쪽, 2장 ‘젊은 도화서 화원’ 중에서

 

당시 김홍도는 29세에 불과한 청년 화가였다는 사실이다. 주관화사였던 변상벽은 40대 후반이었으며 수종화사들인 김후신, 진응복, 신한평, 김관신 모두 40대~50대 초반에 해당되는 중견화가들이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김홍도에게 수종화사들인 김후신, 진응복 등은 아버지·삼촌뻘에 해당되는 선배 화가들이었다. 29세였던 김홍도를 보조하는 역할을 연배가 한참 높은 선배들이었던 신한평 등이 맡았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중략) 김홍도에게는 모두 아버지·삼촌뻘에 해당되는 선배 화가들이 김홍도를 돕는 수종화가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1773년 당시 도화서 내에서 김홍도가 차지하고 있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다. ― 75~76쪽, 2장 ‘젊은 도화서 화원’ 중에서

김홍도는 병풍화의 대가였다. 따라서 단원풍속화첩을 근거로 김홍도를 풍속화의 거장으로 평가한 것은 그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왔다. 김홍도가 남긴 대부분의 명작은 모두 병풍화이다. 그는 병풍화를 통해 새로운 회화적 실험을 감행하였다. 그가 남긴 신선도, 풍속도, 금강산도, 평생도, 책거리 그림, 수렵도는 19세기 병풍화의 모델이 되었던 선구적 작품들이다. ― 84쪽, 3장 ‘위대한 시작’ 중에서

 

군선도는 개인의 주문을 받아 김홍도가 제작한 그림이다. 따라서 군선도를 그릴 때 김홍도는 정묘한 화풍 구사와 같은 도화서의 규칙을 따를 의무가 없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자신이 원하는 화풍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가 도화서 화원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법을 사용해 그린 최초의 회심의 역작이 바로 군선도이다. 이 그림을 통해 김홍도는 다양한 회화적 실험을 감행했다. ― 104쪽, 3장 ‘위대한 시작’ 중에서

 

정조의 김홍도에 대한 신뢰는 남달랐다. 1783년(정조 7)에 정조는 자비대령화원 제도를 신설하고 인사고과 시험인 녹취재를 정기적으로 시행했다. 그러나 김홍도는 초대 자비대령화원에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녹취재 시험을 볼 필요가 없었다. 김홍도는 정조의 재위 기간 내내 녹취재 시험에서 면제되었다. 그는 정조로부터 다른 도화서 화원과는 완전히 다른 매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김홍도는 정조가 즉위한 이후 줄곧 ‘왕의 화가’로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으며, 1783년 무렵에는 도화서 내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국중 최고의 화가로 성장했다. ― 196~196쪽, 4장 ‘김홍도와 정조’ 중에서

 

김홍도가 강렬한 문인 취향을 가진 인물이라는 사실은 그가 청년기에 주로 사용했던 자(字)인 사능(士能)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사능의 정확한 뜻은 현재 알기 어렵다. 사능의 ‘사’는 독서인, 사대부, 문인을 지칭한다. 사능의 ‘능’은 능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글자 그대로 ‘유능한 사대부’라는 뜻이 될 수 있다. 또는 사능을 ‘물질적인 것에 좌우되지 않고 변함없이 올곧게 처신하는 사대부’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 사능 중 ‘사’와 ‘능’은 서로 상반되는 의미일 수 있다. 사능 중 ‘사’는 문인, 사대부를 뜻하지만 ‘능’은 능력, 재주를 의미하기 때문에 기술직 중인을 지칭할 수 있다. 즉, 사능은 중인이지만 사대부를 지향하는 인물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어쨌든 김홍도의 자인 사능의 ‘사’에서 그가 지니고 있던 사대부적 취향을 살펴볼 수 있다. ― 354쪽, 7장 ‘자아의 영역’ 중에서

 

김홍도와 관련해서 주목해 보아야 할 사항은 1776년경 건륭화원을 대표하는 당시 최고의 궁정화가였던 서양이 사라지면서 중국 회화가 암흑기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1776년 조선에서는 정조가 새로운 왕이 되었다. 정조가 등극하면서 김홍도는 도화서를 대표하는 최고 화가로 급성장했다. 1776년에 그는 32세였다. 이해에 김홍도는 군선도를 그리면서 병풍화의 대가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건륭화원을 대표했던 서양의 퇴장과 정조 시대 도화서를 대표했던 김홍도의 등장이 1776년 전후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1776년은 두 화가의 운명을 가른 해였다. 서양은 저녁노을을 남기며 쓸쓸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저무는 해’였다. 반면 김홍도는 새벽의 어둠을 가르고 세상을 빛의 세계로 만들며 등장하는 ‘떠오르는 해’였다. ― 404쪽, 8장 ‘김홍도와 18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회화’ 중에서

 

 

차례

머리말

프롤로그

 

1. 김홍도는 누구인가

집안 배경 | 안산 | 천재 소년 | 김홍도와 강세황

 

2. 젊은 도화서 화원

도화서 입문 | 정확한 묘사력과 치밀한 채색 능력 | 도화서와 도화서 화원 |

화원의 경제생활 | 도화서 화원 집안 | 의궤 제작 | 어진 제작 | 김홍도의 명성

 

3. 위대한 시작

조선시대의 병풍화와 김홍도 | 1776년 봄, 《군선도》 | 신선들의 장대한 행렬 |

호쾌한 화풍 | 극적인 화면 구성 | 창덕궁의 벽화 |

 

4. 병풍화의 대가

새로운 비전: 김사능의 속화 | 김두량, 윤두서, 조영석의 풍속화 |

완연히 눈앞에 펼쳐진 삶의 현장 | 문인들의 이상적인 예술 모임: 《서원아집도》 |

그림으로 표현된 인생: 평생도 | 당대 최고의 병풍화가

 

5. 김홍도와 정조

1776년 3월 | 규장각과 자비대령화원 | 〈해상군선도〉 벽화 | 1788년의 금강산 사경 |

정조의 지리에 대한 관심 | 실경산수화와 지도 | 어람용 금강산 그림 |

금강산 그림의 새로운 전기: 《해산도병》 | 김응환의 한계 | 봉명사경 활동의 주역 |

정선을 뛰어넘은 김홍도

 

6. 정조의 화성 건설과 김홍도

정조와 용주사 불화 | 사면척량화법과 책가도 | 책거리 그림의 인기 |

정조 초기의 정국 | 정조의 화성원행 | 화성원행의 기록: 『원행을묘정리의궤』 |

《화성원행도병》과 김홍도 | 화성 건설과 『화성성역의궤』 |

화성의 가을: 〈서성우렵〉과 〈한정품국〉

 

7. 자아의 영역

정조에게 바친 마지막 그림: 《주부자시의도》 | 현존하는 최후의 병풍: 《삼공불환도》 |

김홍도의 문학적 소양 | 〈단원도〉와 김홍도의 자긍심 | 단원이라는 호 |

문인 취향과 의식: 〈포의풍류도〉 | 중인의 비애 | 인생의 가을: 〈추성부도〉 |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

 

8. 김홍도와 18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회화

건륭제와 청대 화원 | 청대 궁정회화의 정치적 성격 | 몰락의 시대 |

운명의 해, 1776년: 서양과 김홍도 |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일본의 화가들 |

전문적인 직업화가의 한계 | 기상의 매너리즘화 | 모든 그림 장르에 탁월했던 김홍도

 

에필로그

저 :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Jane and Morgan Whitney Fellow로 활동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전공 분야는 한국 및 중국회화사이다. Landscapes Clear and Radiant(2008) 등 여러 권의 공저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역서로 『화가의 일상: 전통시대 중국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작업했는가』(사회평론아카데미, 2019)가 있으며 겸재 정선에 대한 연구서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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