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장편소설 『파업』, 20년 만에 개정 출간
소설가 안재성의 장편소설 『파업』이 개정 출간되었다. 1989년 초판이 나온 뒤 꼭 20년 만이다. 『파업』은 방현석의 <새벽출정>, 정화진의 <쇳물처럼> 등과 함께 80년대를 대표하는 노동소설이다. 20년 전에는 이렇게 근사한 수식어를 언감생심 꿈꿀 수 없었다. 정식 출간도, 제대로 된 판매도 쉽지 않았다. 문단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문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당시 운동권 언저리에라도 있던 사람이라면 지금도 『파업』을 기억한다. 막 민주주의가 꿈틀대며 희망을 싹틔우던 기억과 함께 『파업』을 떠올린다. 이렇듯 20년 전 노동운동을 위해 집필된 『파업』은 역할을 다하고 역사 속으로 소멸하는 듯했다. 그런데 이 오래된 이야기가 20년 만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최초의 장편노동소설
『파업』은 1989년 제2회 전태일문학상 출품작이며, 최우수 당선작이다. 심사를 맡았던 임헌영 선생의 심사평을 통해 파업에 대한 당시의 평가와 반응을 짐작해볼 수 있다.
장편소설 『파업』(출품 당시 제목은 『동지의 약속』)은 80년대를 마감하는 노동문학의 소중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전태일문학상 최우수 당선작이기도 하지만 노동소설로서 장편으로서는 최초의 것이라는 영예를 안고 있다.
80년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이 노학연대의 단계로 접어드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소모임, 정치학습, 일상투쟁, 해고, 복직투쟁, 노조결성, 구사대와 경찰의 폭력, 분신, 파업농성, 투옥, 노조사수투쟁 등 일련의 노조결성과정을 실재했던 한 대규모 사업장을 무대로 하여 훌륭하게 정형화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중조직과 전위조직의 건설을 둘러싼 여러 정파간의 이론투쟁과 그들의 사업장에서의 헌신적인 활동 등을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80년대 후반기 노동운동의 모든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특히 상섭, 진영, 동영, 동석 등 선진노동자와 홍기, 기준 등 학출 노동자가 함께 어우러져 우리 사회 변혁의 주체로 나서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1980년대는 소위 노동문학, 민중문학이 봇물을 이룬 시기이다. 80년대 초에는 「노동의 새벽」을 비롯한 시가 주류를 이뤘다면 후반기에는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86년 출간된 정화진의 「쇳물처럼」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1989년 장편소설 『파업』이 등장하게 된다. 이렇듯 80년대 노동문학의 양상은 시에서 소설로, 그리고 장편소설로 확장되어갔다. 자연스럽게 노동문학의 역할과 가능성이 확장되었다.
『파업』은 1989년 12월 25일 도서출판 세계에서 출간되었다. 정확한 판매 부수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1991년에 인쇄된 11쇄를 어렵사리 확인할 수 있다. 짧은 기간에 지금의 기준으로도 상당히 많은 부수가 인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판매부수도 이에 상당했을 것이다. 20년 전 소설을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일 것이다. 더욱이 사람들이 지금도 책을 찾는다는 점은 놀랍다. 이미 오래 전에 절판된 책을 주로 현장의 노동자들이 찾는다. 절판된 책을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고 책을 찾는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볼 수도 없어서 <리얼리스트 100>을 통해 연재 형식으로 전문을 공개하기도 했다. <노동자의 책>에서도 PDF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을 복사해서 돌려 읽는 노동자들을 볼 때마다 작가는 개정판 출간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일본에 『게공선』이 있다면, 한국에는 『파업』이 있다.
2009년 영화로도 제작된 『게공선』은 일본의 대표적인 계급주의 작가인 고바야시 다키지의 1929년 작품이다. 홋가이도 캄차카 반도의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파도 속에서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고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처참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2008년 재발간된 이 책은 현재 160만부가 넘게 팔리면서 가히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의 침체된 경제·사회적 현실이 이런 돌풍의 배경이 되었다. 이른바 ‘워킹푸어’ 세대인 일본의 젊은이들은 책을 읽은 후 공산당에 대거 가입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재일조선인 학자 서경식은 한겨레 신문 지면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고바야시 다키지 따위를 읽는 것은 연구자나 기인들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빈곤’이 다시금 절실한 실감 속에 거론되는 사회가 됐다. 젊은이들이 『게공선』을 읽는 것은 거기에 묘사된 비인간적인 착취의 세계에 자신들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의 성공 이후 『게공선』은 곧 번역되었다. 한국어판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양극화, 워킹푸어(Working Poor)…혹시 이 현상이 게공선 아닌가요?” 이런 문구가 일본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문화적인 차이 등의 이유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의 비정규직과 88만원세대가 실감하고 있는 현실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느끼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킴으로써 이른바 87년체제를 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정치적 민주주의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경제적으로도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고 노동자들의 생활도 20년 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일부 노동자들은 귀족으로까지 불린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시장 유연화 기치 아래 비정규직이 정규직 숫자를 넘어섰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노동에 대한 무차별 공격은 자본주의 초기의 자유방임 시절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노동자의 책>의 한 독자는 『파업』에 이런 서평을 남겼다.
“너무나 많이 울었습니다. 인물들이 내 주변과 닮아서, 또 20년이 지나도 조건과 환경이 너무나 달라진 게 없어서…”(2005. 8. 5)
자본의 눈부신 발전 이면에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이 있다. 그러나 20년 전과는 달리 더이상 노동자의 처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다. 『파업』이 복귀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작가는 서문을 통해 이러한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파업』이 출간된 당시, 진보문학계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평론가 한 분이 ‘분신한 노동자의 시신을 경찰에게 뺏기다니 이런 비현실적인 설정이 어디 있느냐’고 혹평한 적이 있었다. 당시 분신한 노동자나 대학생의 시신을 경찰에 빼앗긴 사건이 적어도 열 차례는 일어나고 있음에도 저명한 평론가께서는 실제 현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파업』이 문학적 완결성의 측면에서 심각한 결함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남한의 진보적 문인들이란 사람들이 노동문제에 얼마나 무지하고 무관심한가를 잘 보여준 사례였다.
사정은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노동문제를 직접 다루는 글은 쓰는 이도 없고, 물론 글이 없으니 읽는 이도 없다. 사실주의 문학, 노동문제를 소재로 한 문학에 거리두기는 자칭 진보적인 문학가 혹은 노동자 문학회 출신들이 더 심하기도 하다.
인간의 절대다수가 소속된 노동자의 현실이라는 주제보다 더 보편적인 진리를 찾아 헤매는 그들에게 나는 여전히 말할 수밖에 없다. 개정된 『파업』 역시 노동운동의 일환으로 써졌다고. 노동계급의 단결을 선동하고 투쟁방법을 제시하며 참된 노동운동가들의 헌신성을 예찬하기 위해 써졌노라고. 자본이라는 이름의 유령과 싸우기 위해 쓰여졌노라고. 자기 자신과 가족이 아닌, 타인을 위해 젊음을 바친 모든 진보운동가와 열사들에게 이 책을 바치노라고.
소설가 안재성과 『파업』
『파업』을 출간하고 몇 권의 책을 더 쓴 뒤 작가는 10년이 넘도록 다시 글을 쓰지 않았다. 그가 청춘을 바친 80년대와는 너무 달라진 90년대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는 흔히 ‘『파업』의 작가’로 불렸다. 소설가 안재성에게 『파업』은 그의 젊은 시절 전부와 다름없다. 1960년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한 작가는 1978년 강원대 축산과에 입학했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는 1979년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집에 머물던 중 우연히 TV에서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현장을 보게 된다.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에 분개한 그는 그길로 신민당사를 찾아갔다. 항의를 위해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무장한 경찰들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이후 사회 현실에 눈뜬 그는 강원대 운동권 모임인 ‘민중문화연구회’에 가입하고, 동료들과 함께 ‘미래사회당’이라는 당을 결성했다. ‘서민대중들이 잘 사는 나라, 민주주의를 이룩하자’라는 강령도 만들었다. 1979년 말 10.26사태가 발생하고, 전두환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광주민중을 학살했다. 그는 서울 종로에서 집회를 계획하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연루자로 수배되었다. 마냥 도망 다닐 수도 없고, 군대 갈 때도 다가왔다. 자기가 한 일이 떳떳한 일이었다고 생각한 그는 당당하게 경찰서를 찾아갔다. 하지만 보안대 군인들과 헌병들은 그를 무자비하게 때렸다. 죄목은 ‘계엄포고령 위반’이었다. 하루 24시간, 서너 명이 돌아가면서 몽둥이로 하루 종일 때렸다. 그는 맞으면서도, 때리는 놈들이 지쳐서 헐떡거리는 게 보였다고 한다. 등뼈가 내려앉고 귀에서 피가 흘렀다. 의자에 거꾸로 매달리는 고문도 당했다. 숨길 것이 없어 묻는 대로 대답하는데도 하루 종일 때렸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맞고 교도소로 넘어갔다. 교도소에서 석 달을 복역한 뒤 군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3년이 지나 제대할 때 보안대는 그에게 프락치를 강요했다. 학교로 돌아가서 친구들을 밀고할 수는 없었다. 1983년, 영등포 산업선교회를 무작정 찾아간 것이 그때였다. 이곳에서 그는 노동운동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그는 구로공단 내의 동일제강, 청계피복노조, 사북탄광 등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그중 동일제강이 소설의 배경이 되었다. 그는 동일제강에서 함께 일한 절친한 벗 박영진이 분신, 사망한 것을 『파업』에서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박영진이 분신한 것은 1986년, 그로부터 2년 뒤인 1988년에는 사북탄광에 함께 일한 또 한 명의 벗 성완희가 분신, 사망한다. 절친한 벗들의 잇따른 분신에 그는 “정신이 나가버리는 듯했다”고 회상한다. 분노와 슬픔은 극에 달했지만 수배상황이었던 그는 8만 원 구로공단 쪽방에 갇혀 꼼짝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파업』을 썼다. 자본과 권력에 대한 분노와 경멸을 아낌없이 표출하고, 자신과 벗들의 젊음을 고스란히 바친 노동운동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렇게 자신의 젊음을 고스란히 글로 옮겼다.
“파업” 줄거리
구로공단에 위치한 대영제강은 공업용 와이어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열악한 근로조건과 24시간 교대근무, 형편없는 급여는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 안전시설을 갖추지 않은 설비 때문에 산업재해가 끊이지 않지만 회사는 제대로 보상조차 하지 않는다. 노동운동가인 홍기는 이런 대영제강에 위장취업하여 노조를 설립하려고 한다. 마음이 맞는 노동자들을 규합하고 노조 설립을 준비하던 그들에게 회사의 탄압이 시작된다. 정부와 노총은 노동자들을 돕기는커녕 회사 입장에서 탄압을 돕는다. 해고되고 폭행당하는 노동자들, 결국 궁지에 내몰린 한 노동자가 분신한다. 이 일을 촉발로 노동자들의 분노는 폭발하고 전면적인 파업을 벌이게 된다.
저 : 안재성
1960년 경기도 용인 출생으로 강원대학교 재학 중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되어 제적되었다. 90년대 중반까지 구로공단 동일제강, 청계피복노동조합, 태백탄광지대, 구로인권회관 등지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장편소설로 『파업』(1989), 『사랑의 조건』(1991), 『황금이삭』(2003)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다.
인권과 역사에 관심을 두고 여러 활동을 했으며, 현재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역사와 역사 인물 책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작품 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현재 경기도 이천에서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