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1997년,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
1998년, 『한국이 그래도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는 18가지 이유』
2008년, 『여러분 참 답답하시죠?』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1년 전인 1997년 여름, ‘도발적인’ 제목을 단 책 한 권이 서점가를 휩쓸었다. 그 책은 바로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 지은이는 당시 한국에서 28년째 근무하고 있던 도멘 상사의 서울지점장 모모세 타다시 씨였다. 그는 처음 책 제목을 ‘한국 사람이 되고 싶은 일본인’으로 할까 고민할 정도로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애정이 깊은 만큼 싫은 소리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책에서 자신이 겪은 한국, 한국 경제, 한국 사람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1997년 당시는 나라 전체가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낙관론에 빠져 있던 때였다. 이러한 때 재벌기업의 부도사태를 비롯해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이대로는 위험하다.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설파한 그의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책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일본에도 수출되어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97년 말, 모모세 타다시 씨의 경고와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한국 경제가 IMF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온 나라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우리는 실패했다’는 절망감과 ‘우리가 할 수 있을까’라는 자신감의 상실이었다. 이때, 그는 한국인들에게 또 하나의 책을 내밀었다. 『한국이 그래도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는 18가지 이유』. 한국이 낙관적인 분위기에만 젖어 있을 때, “이만큼 왔으니 한국이 선 자리를 한번 되짚어보자”며 비판을 아끼지 않던 지은이가 어려운 시절을 겪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그랬던 모모세 타다시 씨가 10년 만에 또 한 권의 책을 내민다. 『여러분 참 답답하시죠?』. 지은이는 왜 10년 만에 다시 돌아와 한국 독자들에게 이 책을 내놓은 것일까? “한국, 이대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세계는 본격적인 글로벌 시대에 접어들었다. 점점 좁아져가는 세계 속에서 각 나라의 기업과 정부는 무한경쟁을 하게 되었고,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세계적이지 않은 것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러한 흐름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이 지나온 10년은 글로벌 시대의 흐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시간이면서 동시에 IMF 사태를 극복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동안 한국은 세계은행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조건들을 이겨내며 IMF 국면을 빠르게 벗어났다. 현재 한국은 GDP나 교역량 규모에서 세계 11, 12위권을 오르내리고 있고,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넘어섰다. 몇몇 분야에서는 세계 1, 2위를 다투는 기업도 나타났다. 이제 한국은 선진국, 일류국가로 국제무대에서 인정받고 활약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사실 한국의 경제력은 이미 선진국 수준이다. 세계 2백여 개 국 가운데 10위권의 경제규모를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한국은 정말 선진국인가?’하고 물으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경제력으로만 보자면 선진국이 되고도 남는 한국이 왜 아직도 선진국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걸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모모세 타다시 씨가 『여러분 참 답답하시죠?』를 내놓는 것은 이런 답답한 물음에 그 나름의 솔직한 생각을 한국인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다.
그는 11년 전 모두가 한국 경제의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을 때 ‘한국 경제 이대로는 위험하다’며 쓴소리를 던진 바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모두가 선진국, 일류국가의 꿈을 그리고 있을 때 ‘이대로는 한국이 선진국이 될 수 없다’며 다시 한 번 쓴소리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으로 가는 열쇠, 국가 품격
모모세 타다시 씨는 한국의 현재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한국은 지금 선진국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계속 그 문턱에서 미끄러지고 있다. 왜 그럴까? 좀 더 경제성장을 해 소득을 늘려야 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한국이 지금 선진국으로 나아가지 못 하는 건 물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식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경제는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했지만, 의식이 못 따라오는 것이다. 의식은 곧 그 나라의 ‘품격’을 말한다. 한국이 선진국, 일류국가로 도약하려면 그 위상에 걸맞은 국가 품격을 갖춰야 한다.” 그는 일본의 상황을 예로 들며 국가 품격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얼마 전 일본에서는 『국가의 품격』이라는 책이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다. 이 책은 ‘21세기는 지난 세기처럼 근대성과 개발이라는 논리만으로 한 국가를 유지하기 어려운 한계에 봉착했다’고 진단하고, ‘성장이나 발전 같은 문제보다는 국민 개개인의 정신문화적 정서를 회복하여 품격을 갖춘 명품국가를 만들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런 메시지를 담은 책이 많이 팔린 데서 알 수 있듯이, 현재 일본은 ‘경제제일주의’에서 벗어나 ‘국가 품격’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국가 품격이 중요하다는 인식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한국은 언제까지 ‘경제만 성장하면 모든 게 해결되겠지’라는 20세기의 타성에 젖어 있을 것인가?”
이어 그는 일부 계층이 아닌 국민 전체가 품격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제도와 정책은 국가가 정하고 관리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의 품격은 사정이 다르다. 한 국가의 품격은 사회 구성원 전체가 만들어가는 향기에 가깝고, 사회 구성원들의 성숙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정치인, 기업인,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국민들이 품격을 갖춰야 한다.” 그는 책에서 정부, 기업, 국민들 각각의 ‘품격 없는’ 모습들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렇다고 그가 단순히 한국을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건 아니다. 그는 그동안 한국이 이룩한 성과에 감탄하고 한국인의 잠재력을 믿으면서, ‘이 정도의 능력과 잠재력을 갖춘 한국이 왜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나?’라는 답답함과 ‘이런 문제를 해결하면 한국은 충분히 선진국, 일류국가가 될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다시 펜을 들었다고 말한다.
2008년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 되는 해다. 60주년이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전환점을 의미하듯이, 지금 한국은 선진사회, 일류사회로 가느냐, 못 가느냐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이러한 때 ‘일류가 되려면 품격을 갖춰라!’고 하는 모모세 타다시 씨의 쓴소리는 한국이 외형만 선진국인 데서 벗어나 체질 자체를 선진국, 일류국가로 바꾸는 데 좋은 보약이 될 것이다.
모모세 타다시 씨가 바라보는 ‘품격 없는 한국’ 베스트 10
1.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없는 나라
한국은 사회 지도층의 사회 기여나 솔선수범이 너무나 부족하다. 일류국가에 걸맞은 국가 품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지도층이나 기득권 계층이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한국의 지도층은 그러한 역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국민들에게 실망감과 절망감을 안겨줄 때가 많다. 특히,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매우 크다. ‘고소영’, ‘강부자’ 내각으로 대표되는 이명박 정부의 인선 파동이 단적인 예다. ‘고소영’, ‘강부자’ 내각은 지금 시대의 리더십이 될 수 없다. 일류국가를 목표로 한다는 정부가 리더를 구성한다고 했는데, 겨우 ‘강부자’, ‘고소영’ 내각에 머무르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일류국가는 한마디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나라다.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여 신뢰받는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대기업도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대기업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바로 ‘세금을 잘 내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대기업은 세금 물기를 매우 싫어하는 것 같다. 기업이 세금을 내는 것은, 기업이 이익을 낼 수 있게 도와준 국민들에게 돌아갈 몫을 지불하는 것과 같다. 기업이 직접 돌려주기 힘들므로 나라에다 주어 대신 그 혜택을 온 국민에게 돌리라는 뜻이다. 기업의 세금은 곧 그 기업의 공적인 위치와 비례한다. 대기업이 세금을 많이 내야 하는 이유는 구멍가게가 세금을 적게 무는 이유와 같다. 한국의 대기업은 이제 구멍가게 흉내는 그만 내고 대기업답게 행동했으면 좋겠다.
2. 깨끗하고 공정한 룰이 없는 나라
한국은 비자금, 뇌물, 탈세 등과 같은 기업의 파행과 탈선이 유난히 많다. 이 정도의 경제력에다 세계적 기업까지 갖고 있는 나라라면, 기업 윤리랄까 자본주의 경제 시장에 걸맞은 규칙이 이미 서 있어야 한다. 어느 나라나 기업의 부도덕한 탈선은 있지만, 한국 대기업들은 유독 잦은 것 같다. 오죽하면 외국 신문에 ‘재벌과 휠체어’를 주제로 한 기사까지 났겠는가. 한국 대기업의 부도덕성은 과거 경제가 빠른 시간 안에 급속히 성장했을 때 ‘특혜’와 ‘정치자금’의 잔재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제가 일류국가 수준에 오른 지금도 그런 일이 발생한다는 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계시장에서 그 기업의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국가 브랜드 가치도 떨어지게 된다. 한국 기업의 부도덕성을 대표하는 말이 ‘떡값’이다. 삼성 비자금 사건도 떡값 문제로 시작한 걸로 알고 있다. 기업의 떡값은 정부, 검찰, 언론에 뿌려져 사회 전체의 도덕을 썩게 만든다. 비자금과 떡값 관행을 없애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은 정부가 기업에 세금을 많이 걷는 것이다. 떡값을 준비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많이 걷어 가면 된다. 그런 점에서 비자금과 떡값은 기업만의 잘못이 아니고 정부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한국 대기업의 절세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물론 ‘절세’는 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세금을 줄이는 것으로 ‘탈세’와는 다르다. 그러나 현재 기업의 절세는 교묘히 법망을 피해 세금을 안 내는 것이다. 사회가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해서 그 틈을 이용해 이익을 얻어내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3. ‘빨리빨리’, ‘대충대충’ 문화가 판치는 나라
한국은 대통령이든 시장이든 꼭 자기 임기 안에 모든 걸 완성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서두르게 되고, 서두르다 보면 부실해진다. 지금까지 한국은 ‘빨리빨리’, ‘대충대충’ 문화로 빨리 성장했다. 하지만 이제는 차분하게, 꼼꼼하게 진행하는 내실이 필요하다. 일류국가로 나아가려는 지금, 그럴 때가 되지 않았나. 최근 논란이 됐던 대운하 사업만 해도 그렇다. 정부는 여러 문제점과 국민의 반대가 뻔히 예상되는데도 무조건 ‘할 수 있다’만 외치고 나아가려고 했다. 한국에서 큰일을 진행할 때 보면, 경제성을 꼼꼼히 따져보거나 미리 예상되는 문제에 대비하는 치밀함이 없다. 무조건 시작하고 본다. 그래서 무언가를 후다닥 잘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왜 만들었는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영어몰입교육 정책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 방안이 얼마나 오랜 심사와 숙고, 검토 끝에 발표되었는지 솔직히 의심스럽다. 동네 반상회도 아니고 나들이 준비 모임도 아니고 학생들의 장래를 결정짓는 일인데 그럴 듯하고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금방 발표해서야 되겠는가? 교육은 ‘백년대계’라 했다.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데는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라, 미리 내다보고 준비해야 훌륭한 인재를 키워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정책은 ‘백년대계’보다 ‘한달대계’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4. 커뮤니케이션 기술력은 일류, 소통 능력은 삼류인 나라
세계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기술력을 가진 한국 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각 집단과 계층, 개인 간에 소통이 부족해 혼란스럽다. 현재 무엇보다 소통이 안 되는 두 대상은 정부와 국민이다. 이 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솔직하고 투명한 정치를 펼쳐야 한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국민들에게 구체적인 정책을 알리는 ‘매니페스토’ 정치를 실시해야 한다. 큰 정책부터 자잘한 정책까지 연도별 공약을 발표하고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쇠고기 문제로 취임 초기부터 고생을 한 것도 어찌 보면 이 ‘매니페스토’를 제대로 못해서인 것 같다.
쇠고기 협상의 문제점은 둘째 치고, 정부가 국민들에게 대응하는 태도가 더 큰 문제인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청와대에만 들어가면 눈과 귀가 머는 것 같다. 어떤 한국 사람은 청와대 터 때문이라고 풍수지리학으로 설명했다. 나는 풍수지리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말이 나오는 건, 그동안 대통령들이 국민들의 마음과 여론을 너무 모르고 국민들과 소통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의 아침 보고 회의에는 좋은 내용의 보고보다는 나쁜 내용의 보고가 더 많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이 국민들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
5. ‘나 혼자만 잘 살면 그만’인 나라
지금 한국은 경제 수준도 높고, 국민들의 교육 수준도 높아졌다. 여기에 유교전통이 살아 있다면 서비스도 더 좋아지고 사람들의 아량도 더 넓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보다 요즘 한국 사람들이 더 거칠고 불친절하다. 지하철에서 줄 서서 기다리고 있으면 뒤에서 끼어들기 일쑤고,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치고 들어간다. 또 거리를 가득 메운 불법 주차 차들은 어떤가? 이 차들 때문에 다른 차나 행인들이 지나다니기 불편한건 물론이고 긴급하게 움직여야 할 소방차나 구급차도 제대로 다닐 수 없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런 것에 보통 사람들이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식당이나 집 앞에 쓰레기를 함부로 내놓지도 않았고, 눈이 내리면 집 앞 거리를 쓸곤 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정이 깊어 남을 배려할 줄 알았다. 나는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 사람들 사이에 정이 사라지고 삭막하고 거칠어진 게 제일 슬프다. 철학적인 여유랄까 배려가 사라지고, 성급하고 야박해진 것 같다. 좀 잘 살게 되고 돈이 많아졌다고 그렇게 변한 것인가? 하기는 큰 차,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더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는 것을 보면 돈 탓인 것 같기도 하다.
사교육 문제도 결국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 없이 ‘나 혼자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의 자식교육은 한마디로 출세교육이다. ‘내 아이만은 좋은 학교에 보내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심과 경쟁심에 편승해 사교육 시장은 점점 커진다. 이제 ‘나 혼자만 잘 살자’는 출세교육을 ‘남과 더불어 살자’는 시민교육으로 바꿔야 한다. 또 한국인들은 도로나 학교, 공원 같은 공공 재산은 내 재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이름으로 등록된 집이나 부동산, 예금만 내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금 내는 걸 재산을 빼앗기는 거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솔선수범을 보여야 할 대기업이나 부유층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큰 문제다. 이제 공공 재산을 내 재산과 똑같이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일류국가에 걸맞은 재산관이다.
6. 자기 일에 프로의식이 없는 나라
한국인들 중에는 자신의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 일본인들이 생업에 매우 충실한 것과 대조적이다. 왜 그럴까? 한국인들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든 전부 ‘왕’이 되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모두 출세하느라 장인의 맥이 끊기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 200년 된 두부집이 없는 이유다. 이런 성향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결국 소수의 사람만이 출세한다는 것이 문제다. 출세하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애정을 못 느끼며 불평불만으로 세월을 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큰 손해다. 일류기업이 몇 개 있다고 해서 그 나라가 일류는 아니다.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프로의식을 가질 때, 진정한 일류가 될 수 있다.
한국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하청업체에 머무는 것도 중소기업이 프로의식이 없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중소기업과 일본 중소기업의 가장 큰 차이는 기술력이다. 한국 중소기업은 자기 기술도 없이 대기업의 주문을 따내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다. 반면 일본 중소기업은 대기업보다도 나은 기술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니 일본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끈끈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 중소기업도 대기업만 바라볼 게 아니라 자기만의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중소기업의 기술력은 일류국가로 나아가려는 한국 경제를 받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7.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말로만 외치는 나라
한국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물과 유적이 많다. 한국인들은 이런 문화재에 자부심을 느끼고, 외국인이 오면 자랑스레 보여주곤 한다. 그런데 가만 보면 한국인들은 문화재를 남에게 보여주는 데는 관심이 많지만, 진정으로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 같지는 않다. 남대문 화재가 대표적인 경우다. 남대문 화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사고다. 한국인들은 남대문을 개방하고 그 앞에서 갖가지 축제와 수문장 교대식을 벌이며 외국 관광객들에게 소감을 묻곤 했다. 문화재를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세계인에게 자랑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랑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관리를 그만큼 더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은 잊은 것 같다. 수문장 교대식 같은 눈에 띄는 행사에는 많은 예산을 쏟아 붓고, 관리는 무료 업체에 맡겼다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한 국가의 품격은 자신의 전통과 역사를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8. ‘졸부’식 소비가 판치는 나라
일류국가 국민들은 ‘합리적 소비’와 ‘절약정신’이 몸에 배어 있다. 그래서 무절제한 ‘명품 좇기’식 충동구매나 과시적 소비에 빠지지 않고, 소득수준, 품질, 가격을 꼼꼼히 따져보고 물건을 구입한다. 그러면 한국의 소비자들은 어떤가? 나는 우연히 백화점에 갔다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면세점을 찾은 손님들이 거의 다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또 백화점 매장에는 다양한 외국 제품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한편, 현재 한국에 들어오는 외국 관광객은 한 해 6백만 명 정도인데 외국으로 떠나는 한국 관광객은 그 두 배가 넘는다고 한다. 한국인의 통 큰 씀씀이를 생각하면, 한 해 외국으로 빠져 나가는 관광비용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물론 소득 수준이 올라가면 외국 제품 구입이나 해외여행이 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치면 문제다. 단순히 가정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넘어 국가 대 국가의 무역적자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경제가 성장했다고 해서 바로 씀씀이가 커지면 졸부와 다를 바 없다. 한국이 일류국가로 나아가려면 국민들부터 합리적이고 국가 경제를 생각하는 소비습관을 길러야 한다.
9. ‘우물 안 개구리’식 생각을 하는 나라
지금 한국의 경제력은 10위권이라지만 세계에서 한국의 인지도는 이에 못 미친다. 한마디로 존재감이 약하다는 뜻이다. 아직도 한국인들이 외국에 나가면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냐는 질문을 받고, 삼성이나 LG, 현대 같은 대기업의 제품은 품질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는다. 존재감이 약한 나라는 세계시장에서 장사할 때도 불리하지만 국제무대에서 발언권을 얻기도 쉽지 않으며, 발언을 해도 영향력이 크지 않다. 그럼 왜 한국은 이토록 인지도가 낮을까? 내가 보기엔 인지도를 올리는 노력이 부족했고, 방법도 적절치 않았다. 그동안 한국은 다른 나라에 진출하여 제품을 파는 것에는 관심을 쏟았지만, 상대적으로 해외원조나 봉사활동 등에는 소홀했다. 인지도를 높이는 방법도 세계 대회나 행사를 유치하는 데 집중됐다. 이런 큰 행사는 인지도를 반짝 올리는 효과는 있지만, 그걸 지속시키지는 못 한다. 결국 평소에 꾸준한 원조와 활동을 통해 한국이 ‘혼자만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 ‘이웃은 물론 세계와 함께 어울려 사는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그럴 때 세계는 한국을 ‘성숙하고 품격 있는 나라’로 인정할 것이다.
한국은 분단이라는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지만, 그걸 역으로 이용해 북한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남북한 젊은이들이 평화부대를 만들어 세계에 진출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또 ‘새마을 운동’으로 대표되는 자립의 경험을 전해줄 수도 있다. 이 모든 건 한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10. 미래 구상에 ‘환경’이 없는 나라
21세기에는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한’이라는 말이 화두라고 한다. 이 말 뜻은 예전처럼 환경을 파괴하고 소모하면서 경제 개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보호하고 오염을 줄여 나가는 방향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사람들의 삶도 건강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이제 사람과 사람 사이뿐만 아니라 사람과 자연 사이에서도 품격이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서울의 도시 개발을 보면 거꾸로 가는 것 같다. 아름다운 하늘과 주변의 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이런 옛 도시에다 아파트와 고층건물을 흉물스레 채워 넣으니 말이다. 대운하 계획만 해도 그렇다. 지금 선진국들은 새로운 기술, 그것도 주로 환경을 보호하는 첨단 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다른 나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도해나갈 기술을 준비하고 있는데, 한국은 언제까지 원료로 물건 만들고 토목공사만 할 것인가? 정말로 대운하가 기초첨단 기술 개발보다 더 시급한 일일까? 이런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은 경제는 선진국, 일류국가 수준일지 모르지만, 의식이나 품격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