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물러설 줄 몰랐던 반전운동가, 자유로운 영혼을 키우고자 했던 교육자
정의를 요구했던 사회개혁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수학과 논리학의 신기원을 이룬 학자
러셀의 수많은 모습이 이 한 권의 책에 녹아 있다!
버트런드 러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그의 직업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나의단어로 규정하기에는 그는 너무도 많은 영역을 넘나들었고 그 모든 영역에서 쉽지 않은 업적을 이룬 사람이기 때문이다. 러셀은 자유로운 교육을 실험했고, 컴퓨터 발명의 뿌리가 되는 수학의 체계를 세웠고, 논리학의 근본을 뒤집었고, 핵무기의 확산을 저지하고자 싸웠던 '100인 위원회'를 이끌었고, 반핵 시위를 주도하여 90이 다 된 나이에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100년에 가까운 삶을 살면서도 한순간도 열정을 잃지 않았던 사람. 그의 칼럼을 모은 『런던통신 1931~1935』는 그처럼 다양한 러셀의 모든 것을 단 한 권으로 만날 수 있는 책이다.
러셀이 남긴 마지막 책,
그 책을 만나기 위해 세상은 40년을 기다려야 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1931년에 미국 허스트 그룹 소유 신문들의 고정 필자가 되어 1년에 1,000파운드나 되는 원고료를 받으면서 4년 동안 칼럼을 썼다. 그중 몇 편은 훗날 영국 잡지들에 다시 실렸지만 대부분은 책으로 출판되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런던통신 1931~1935』는 그 에세이들을 모아 러셀의 승낙을 얻은 다음 그의 사후인 1975년에 펴낸 책이다. 마지막 글이 씌어지고 40년이 지난 다음에야 출판될 수 있었던 것이다. 편집자 해리 루자는 "잊혀서는 안 될 것들"이 잊혔다면서 "솔직하고 현명한 독자라면 이 판단에 동의하리라고 자신한다."고 말했다.
편지처럼 친근한 135편의 에세이
러셀이 쓴 가장 쉬운 책으로 20세기 최고의 지혜를 만난다!
러셀은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기로 이름 높은 작가이며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읽기 쉬운 책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행복의 정복』 등의 에세이가 한국에 소개되었지만 그 책들은 몇 번을 곱씹어야 소화할 수 있는 철학책에 가까웠다. 그러나 『런던통신 1931~1935』는 러셀이 남긴 어떤 책보다도 쉽고 친근하고 유머 있는 책이다. 네 쪽을 넘는 글이 거의 없는 이 책은 분량도 부담이 없지만 소재도 일상에서 찾은 것들이어서 러셀의 명성 때문에 오히려 부담을 느꼈던 독자들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러셀이 다룬 소재들은 우리 모두의 생활과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러셀은 「우리는 사고 싶지 않았다」에서 휴가를 가는 대신 그랜드 피아노를 사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도'에게 습격당한 가장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피아노를 놓을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하지만 강도는 벽을 조금만 헐면 거실에 놓인 피아노의 꼬리가 멋진 침실로 튀어나오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처량하면서도 웃긴 이야기의 결말은 생산과 소비의 관계가 역전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악순환을 향한 비판이다.
러셀의 저서로는 거의 유일하게 대중 칼럼의 형식을 택하고 있는 『런던통신 1931~1935』는 러셀을 처음 만난 독자에게는 20세기 가장 깊었던 지혜와 조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이미 러셀을 만난 독자에게는 근엄한 철학자의 유쾌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기쁨을 전해줄 것이다.
저 :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20세기 최고의 지성,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 여성 성해방 운동가, 전투적 평화주의자, 철학ㆍ수학ㆍ과학ㆍ교육ㆍ정치ㆍ예술과 종교를 아우르는 전방위 문학가로서 19세기 전반에 비롯된 기호논리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인 러셀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건재하다. 20세기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사람으로로 철학, 수학, 과학, 역사, 교육, 윤리학, 사회학, 정치학 분야에서 40권 이상의 책을 쉬지 않고 출간할 정도로 왕성한 지식욕을 가진 인물이었다.
1872년, 제국주의 영국의 수상을 두 차례나 역임한 존 러셀 경의 손자로 태어난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이 가진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행동으로써, 글로써 시대의 진실을 알린 저항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그 대학의 강사가 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 반전운동(反戰運動)에 참여한 것이 화근이 되어 사직했고, 1918년에는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후 유럽 및 러시아와 미국 등을 방문하여 대학의 강의를 맡기도 했으나 주로 저술활동에만 전념했다.
그의 탁월함은 자신의 지능을 최대한 사용하는 놀라운 능력(그는 하루에 거의 고칠 필요가 없는 3,000 단어 분량의 글을 썼다고한다)과 기억력이 밑받침 되었지만 그의 활동력의 원천은 심오한 휴머니즘적 감수성이었다. 그의 사상은 분리된 두 개의 주제를 갖고 있었다. 그 하나는 절대 확실한 지식의 탐구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삶에 대한 관심이었다. 전자는 그의 스승이며 협력자였던 화이트 헤드와의 공저 "수학원리"로 결실을 맺어 현대의 기호논리학과 분석철학의 기초를 이루었다. 이 책은 수학적 대상을 실재라고 간주하여 논리에 의해 기초를 세우고 수학을 논리로부터 도출하려는 그의 시도를 담고 있었다.
철학자로서의 그의 업적은 특히 이론철학에서 두드러지고 있다.그는 무어, 비트겐슈타인 등과 더불어 케임브리지 학파의 일원으로 19세기 말부터 영국에서 유력한 학설이었던 관념론에 대한 실재론을 주장했었다. 하지만 그는 곧 헤겔학파, A.마이농 등 당대의 철학 흐름 변화를 따라 자신의 사상을 조금씩 발전시켰으며 신실재론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는 인식론과 존재론을 사상의 소재로 활용했으며 영국 고유의 경험론을 그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의 사상은 빈학파나 논리적 실증주의를 중시하는 철학자 및 논리학자에게 자극을 주게 된다. 논리학자로서의 러셀은 프레게의 업적을 계승했으며, 페아노와 쿠츨러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며 데데킨트와 칸토어 등의 현대수학의 성과를 근거로 19세기 전반에 비롯된 기호논리학을 집대성했다.
현실 사회에 대한 진솔한 관심과 스스로가 자유로운 무정부주의, 좌파, 회의적 무신론적 기질이라고 불렀던 그의 성향은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평화주의자로,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핵 무장 반대자로서 사회변혁운동에서 일관성 있게 표현되었으며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1979년 웨일즈에서 사망할 때까지 문필가, 철학자, 무정부주의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외계의 지식』,『철학이란 무엇인가』,『서양 철학사』,『사회개조의 제원리』, 『심리분석』, 『서양철학사』, 『물질의 분석』, 『의미와 진실의 탐구』, 『수리철학 서설』 등이 있으며, 특히 1950년에는 『철학에 있어서의 과학적 방법』, 『자유와 조직』, 『권위와 개인』 등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