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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와 미켈란젤로

저자
신준형  저
  • 가격

    18,000 원

  • 출간일

    2013년 11월 20일

  • 쪽수

    244

  • 판형

    153*225

  • ISBN

    9788964356654

  • 구매처 링크

뒤러와 미켈란젤로, 동시대의 위대하지만 많이 다른 르네상스 미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보다 네 살 위인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는 뉘른베르크 출신이었다. 뉘른베르크는 유럽 내륙의 경제 중심지로 상공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활발한 경제활동은 문화적 융성을 가져왔고, 이 지역에서 르네상스의 기운은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르네상스 미술가로서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성, 권력은 금세공인 집안의 아들 뒤러를 자극했다. 하지만 그는 뉘른베르크 출신이었다. 뉘른베르크는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윤택한 도시였지만, 이탈리아도 로마도 아니었다. 뒤러는 자신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지중해와 로마를 향했다. 아마도 로마에 꼭 가보고 싶어 했을 뒤러는, 두 번이나 이탈리아를 향해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미술 유학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결국 로마에 가보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는 최고의 르네상스인이 되려는 야망이 있었지만, ‘주변’ 사람이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미켈란젤로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도제를 거쳐, 메디치 가문이 만든 예술아카데미로 들어간다.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밟아나간 패기만만한 청년 미켈란젤로는 로마에 입성한다. 그리고 이미 20대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피에타」의 제작을 주문받아 성공적으로 납품을 마친다. 당시는 종교개혁이 유럽에서 점차 위력을 넓혀가던 시절이었고, 가톨릭 세력은 교황의 도시 로마를 위대한 미술의 도시로 리모델링해, 가톨릭의 위대함을 과시할 이미지 정치의 계획을 세우던 때였다. 이제 로마는 모든 미술가들이 꿈꾸는 기회의 땅이 되었다. 회화, 조각, 건축 전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미켈란젤로가 이 거대한 프로젝트 속에서 전방위적으로 활약을 펼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로마와 르네상스를 뛰어넘으려고 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분투할 필요도 없었지만, 남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어디에나 고대 문화유산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로마에서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르네상스의 이상적인 미(美)에 몰두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중심’ 사람이었다.

신교와 구교, 북유럽과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건설하겠다는 뒤러의 야망과 르네상스를 넘어야 한다는 미켈란젤로의 강박, 그리고 주변과 중심
신준형의 시도는 굳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설계다. 왜냐하면 르네상스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정답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르네상스는 고전 문화의 화려한 부활이었고, 근대 서양 문명의 토대였으며, 천재들과 명작들의 시대로 정리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확고해 보이기만 하는 정답을 배경으로 뒤러와 미켈란젤로 역시 같은 톤으로 그려주고, 대중들이 이 정답을 익숙하게 소비할 수 있도록 적당히 가공해주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르네상스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수백 년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 이런 정답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저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설계 작업에 들어간다.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 입장에서의 르네상스다.

“서구의 학자들이 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것. 이방인의 시각으로, 즉 유럽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사람의 시각으로 솔직한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의 책을, 옥시덴탈리즘을 인정하는 책을 써보자는 것이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는 책을 한번 써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다 건너 이방의 대륙에서 먼 숲을 보는 나의 질문은 무엇인가? 테마는 바로 문화의 중심부와 주변부이다.”
-본문 7~8쪽-

한국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윤택한 곳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중심이라고 할 수는 없다 


“로마와 뉘른베르크는 단지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이탈리아와 독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16세기의 상황에서는 문명의 중심지와 주변부를 의미했다. 뒤러의 삶과 예술에 끌려 나의 학문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핵심에는 그가 보여준 거의 강박적인 르네상스 이상의 추구, 교만에 가까운 자아의 선언, 명성을 향한 욕구가 있었다. 이는 그가 주변부 지역의 화가였고 일생 그 사실을 첨예하게 의식하고 살았음을 반증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뒤러에게 적지 않은 동질감을 느끼고 공감했다.”
-본문 216~217쪽-

한국에서 외국에 유학을 다녀왔느냐의 문제는 중요하다. 외국, 특히 미국 유학은 한 계단 높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이는 분야를 막론한다. 한국이 잘 나가지 못하던 때,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든 면에서 결핍되어 있던 시기에는 이른바 ‘외국물’이 주는 실제 효용이 있었다. 이제 경제강국으로 크게 부족함이 없는 나라가 되었지만, 여전히 유학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비단 유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주변’인 셈이고, 중심과의 관계가 늘 관심의 집중을 받는다.
서양 르네상스 미술사를 공부하는 한국 저자가 자신의 학문에서 찾으려는, 우리에게도 쓸모 있을지 모를 인문학적 통찰은 이 지점에 있다. 잘나가지만 중심을 신경 써야 하는 뒤러와 그의 도시 뉘른베르크, 주변에서 주목을 받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미켈란젤로와 그의 도시 로마를, 미술사라는 학문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미술은 기본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을 바라보고, 이것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해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두 도시의 예술가는 세계와 자신을 어떻게 그려냈을까? 이들이 바라보고 그려내는 방식에는 자신들이 살았던 두 도시의 다른 환경과 조건이 어떻게 작용했을까? 이것이 나의 질문이다. 찰스 디킨스는 혁명기 파리와 런던을 가지고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를 썼지만, 나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기 뉘른베르크와 로마를 가지고 16세기 판 두 도시 이야기를 쓴다.” 
-본문 10쪽-

뒤러와 미켈란젤로, 그 주변과 중심의 이야기. 먼저 이방인이다
조선시대 한국에서 그려진 풍속화에 한국 사람들이 나오듯이,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서 그려진 그림에는 백인들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시대 그림에는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는 그리스도교와 관계가 깊다. 예를 들어 예수의 탄생 장면 그림에는 흑인이 등장한다. 중세의 신학 전통은 예수 탄생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 세 사람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왕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아프리카 왕이라면 등장인물로 흑인의 모티프가 필요했던 것이다. 뒤러와 미켈란젤로, 주변과 중심은 어떻게 이방인을 그려냈을까? 더 정확하게 말해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은 무엇이었을까?
미켈란젤로는 이방인에 큰 관심이 없었다. 르네상스 회화에 종종 등장하는 흑인이 그의 그림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이방인인 무슬림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그가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고대 로마는 제국이었다. 제국의 수도 로마에는 전 세계에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사실상 인종의 전시장이었다. 로마의 시민권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였을 뿐, 시민권을 얻고 능력만 있다면 제국의 고위직에 오르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인종을 기준으로 한 이방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미켈란젤로가 활동하던 시기 이탈리아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세계 각지의 상인들이 모여들던 이탈리아에서 인종이 다르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역사적 전통과 시대 상황에서 인종이 다른 이방인이라는 점이 미켈란젤로 같은 대가에게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다양한 형태의 인간들을 추상화했다. 그의 작품 속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를 모두 비슷한 신체를 지니고 있다. 그에게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개별적인 차이라는 것은 큰 의미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중심이 만들어준 특징이었다.
뒤러는 어땠을까? 뉘른베르크는 유럽 내륙에 위치한 곳이었다. 상공업이 발달했지만, 외국 상인들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곳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방인을 볼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적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흑인은 르네상스 회화의 모티프 가운데 하나였다. 뒤러는 집요하게 흑인을 연구하고 그림을 그린다. 뿐만 아니라 뒤러는 무슬림, 유대인 등 이방인과 이교도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그림 속에 꾸준히 등장시킨다. 이는 뒤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독일 지역은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들을 미술 작품에 등장시키기 위해 특징을 잡아내는 골상학 연구의 노력이 지속되었던 곳이다. 주변이 만들어준 특징이었다.

주변과 중심으로 뒤러와 미켈란젤로가 구조화되는 사례. 성모 마리아
뒤러는 이탈리아로 미술 유학 여행을 떠났다. 행선지는 두 번 모두 베네치아였다. 미술가라면 당연히 로마로 떠났어야 했지만, 교통과 치안이 모두 안정적이 못하던 당시 상황에서 로마 여행은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베네치아의 경우 독일과 무역을 하는 상단의 루트가 확보되어 있었고, 뒤러는 어쩔 수 없이 이 루트를 따라야 했을 것이다.
베네치아에 도착한 뒤러는 선진 미술을 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르네상스 미술가인지를 베네치아에서 과시하려고 했다. 금세공인 집안의 아들이었던 뒤러는 디테일 묘사에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는데, 이를 본 베네치아 미술가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역시 북유럽 출신 미술가답게 색채보다 선에 강하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베네치아 미술가들은 전통적으로 색채 사용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고, 적당한 선에서 먼 길 떠나 북유럽에서 온 미술가의 능력을 칭찬했던 것이다. 하지만 뒤러는 이를 인정하지 못했다. 기어이 ‘색도 잘 쓴다’는 평가를 들어야만 했다.
때마침 베네치아에 체류하던 독일인들을 위한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 제단화의 주문이 뒤러에게 들어왔다. 뒤러는 그 제단화 「장미 화관의 축제」에 베네치아보다 더 베네치아적인 방식으로 색채를 사용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색채에 대해 어떤 베네치아인들도 트집을 잡지 못했다고 자랑스럽게 기록했다. 뒤러가 보여준 자의식, 성공과 명성에 대한 열망, 그리고 경쟁의식은 르네상스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중심이 있었다. 그는 주변이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와 성모 마리아를 생각하면,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가 떠오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 더불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어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정말 르네상스적인 작품일까? 우선 얼굴을 보자. 「피에타」는 고통 속에 죽어간 예수와 이를 비통해 하는 성모마리아를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 표정은 고통스럽기보다는 오히려 편안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가 피에타의 관건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그 구도를 과감하게 넘어버렸다. 미켈란젤로가 선택한 극복의 방식은 고통을 승화시켜 지나치게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었다. 「피에타」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또 있다. 이른바 비례의 파괴다.
르네상스적이라고 하면, 정확한 인체의 비례가 떠오른다. 그런데 「피에타」는 사실 인체의 비례를 무시한다.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보자. 「피에타」는 삼각형의 구도가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다 큰 성인인 예수를 저런 형태로 안고 있으려면, 성모 마리아는 그 가녀린 얼굴과 상체에 비해 엄청난 굵기의 허벅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삼각형의 구도를 위해 마리아의 신체 비율은 완전히 무시된 것이다. 이미 미켈란젤로에게 신체의 비율이라는 부분은 의미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는 흔한 르네상스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했지, 모두가 따르려고 하는 규칙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중심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뒤러와 미켈란젤로, 뉘른베르크와 로마를 주변과 중심이라는 구조 속에서 분석한다. 그 과정에 서양 미술사의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지만, 관심과 목표는 모두 우리로부터 시작해 우리로 끝을 맺는다.

저 : 신준형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부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오스틴)에서 미술사학 석사학위를, 위스콘신 주립대학(매디슨)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뮌헨 대학에서 독일학술교류처(DAAD) 장학금으로 수학했으며, 아칸소 주립대학 미술과 조교수,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미술사학과 부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천상의 미술과 지상의 투쟁 - 가톨릭개혁의 시각문화』(사회평론, 2007), 『파노프스키와 뒤러 - 르네상스 미술과 유럽중심주의』(시공사, 200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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