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조선시대 불상을 조각한 다섯 승려 집단에 대한 연구
조각승의 계보를 통해 정리한 17세기 조선의 불교조각사
우리나라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주요 불상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 10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시기 파괴된 불상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규모의 수요를 충족시켜준 이들은 승려들이었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활동하며 몇 개의 불상을 조각한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독자적인 집단을 형성했다. 유파의 수장인 수조각승 아래 많게는 30명에 이르는 전문적인 조각가 승려들이 있었고, 일정한 지역을 기반으로 지역 내 사찰을 돌아다니며 불상을 조성했다.
이 책은 17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다섯 개의 조각승 유파와 그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한국 불교조각사 최초로 조각승을 유파별로 정리하고 작품의 특징을 분석하였다. 수조각승 헌진과 청헌, 응원과 인균, 수연, 법령, 무염이 이끌었던 다섯 유파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켜 불상들을 대량으로 조각해냈다. 개별 창작자를 넘어 집단 창작 체계를 구축한 조각승 유파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다.
지금 우리가 절에서 보는 불상, 이것을 만든 사람은?
조선시대 중반, 임진왜란이라는 재앙이 전 국토를 휩쓸고 지나갔다. 궁궐은 물론 사찰까지 모조리 불타버린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전국적 재건이 시작되는데 이때 사찰도 함께 재건된다. 지금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절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전국적으로 사찰이 다시 지어지면서 불상 역시 대량으로 요구되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불상들이 조성되었고, 이때 만들어진 주존불들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이때 대량의 불상을 조성한 사람들은 조각가도 기능공도 아닌 승려였다. 전문적으로 조각만을 하는 장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록에는 이들을 화원(畵員) 혹은 화사(畵師)로 칭하고 있으나 실제 이들의 직업은 승려였다. 현대 학계에서는 이들을 조각승(彫刻僧)이라 부르고 있다.
서양의 작업공방을 방불케하는 조각승들의 작업체계
대량의 불상이 동시에 필요했던 시대적 상황은 당시의 조각승들로 하여금 공동 작업이라는 작업 방식을 채택하게 한다. 조각승들이 집단을 이루어 돌아다니며 공동으로 불상조성작업을 한 것이다. 이 집단은 수화사(首畵師)로 불리는 우두머리 조각승 아래 차화사(次畵師), 그리고 일반 조각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본문 84쪽). 수화사는 작업을 실질적으로 진행하는 감독으로, 가장 중요한 밑그림 그리기와 마무리 작업을 맡았다. 수화사가 밑그림을 그리고 나면 차화사 및 나머지 조각승들이 수화사의 감독하에 전체 통나무를 깎아 몸체를 만들었다. 그 후 얼굴, 다리, 옷주름 등 부분조각을 마치면 마지막에 수화사가 전체적으로 마무리를 한 후 작업을 완성하였다. 마치 마스터는 작품을 수주받고, 작품의 얼개를 구성하고 밑그림을 그리면 제자들이 물감을 개어 채색작업을 도왔던 서양의 작업공방처럼, 17세기의 조각승들은 집단 작업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였다.
다섯 유파의 성립
수조각승 아래 공동으로 작업을 진행하면서, 조각승들은 자연스레 수조각승의 작풍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조각승 집단의 유파가 성립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국미술사에서 그 구체적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첫 작가 그룹이 형성된 것이다. 1610년대에 현진.청헌을 수조각승으로 한 유파의 성립을 시작으로, 응원.인균파, 수연파, 법령파, 무염파, 이렇게 다섯 유파가 17세기 전반에 확립되었다. 가장 규모가 큰 집단의 경우 3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컸던 작가 그룹-유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들이 경제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수량의 불상들이 지속적으로 조성되어야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의 활발한 활동은 당시에 충분한 사회적.경제적 여건이 주어져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다섯 유파의 불상은 어떻게 다를까
불상들을 유파별로 구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유파별 고유의 작업방식은 얼굴, 몸체, 손, 귀, 옷주름의 표현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얼굴 표현방식에서부터 유파 간에 차이가 있다. 현진.청헌파가 만든 불상은 넓적한 사각형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는 턱 양끝이 직각이고 얼굴 전체가 거의 직사각형을 이루는 수연파의 양식과 비슷하다. 이에 반해 응원.인균파의 얼굴은 뺨과 턱에 통통하게 살이 올라 양감이 강조되어 있다. 법령파는 직사각형의 얼굴이지만 입속에 무언가 물고 있는 것 같이 아래쪽 뺨이 불룩하게 나와 있는 점이 특징이다. 한편 무염파의 얼굴은 넓적하면서도 양감이 잘 표현되어 볼과 턱이 튀어나와 있고 코 역시 이마에서 곧바로 뾰족하게 나와 있다.
이외에 몸체와 옷주름에서도 각 유파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불상은 육중하고 건장한 신체를 갖고 있는데 반해, 수연파와 법령파의 불상은 하체가 비교적 빈약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 불단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이 물결무늬인지, 왼쪽 어깨로 흘러내린 대의자락이 'U'자 모양인지에 따라서도 각각 응원.인균파, 현진.청헌파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한국 조각사에서 처음으로 조각가라는 개념을 부각시킨 조각승
조각승은 처음으로 한국 조각사에서 ‘작가’라는 개념을 부각시킴으로써 한국 미술사에 중요한 의미를 던진다. 17세기의 조각승들은 자신들이 조성한 불상 안에 제작연도, 제작에 참여한 조각승 명단 등을 기록한 종이를 넣어 봉안했다. 복장발원문(腹藏發願文)이라 불리는 이 기록을 통해 비로소 우리의 미술사에서 그 이름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최초의 조각가들이 등장한 것이다. 불상의 배 안에 들어있는 복장발원문에는 조각가와 후원자, 봉안처 등 불상 제작과 관련된 모든 정보가 기재되어 있어서 불상 제작에 참여한 조각승 명단을 정확히 제공해준다.
조각승 유파에 주목, 계보를 완성하기 위한 연구
기존에도 조각승에 관한 연구는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이루어진 연구들은 개별 조각승과 불상, 조성 연대를 소개하고 이제까지 밝혀진 조각승들의 목록을 정리하는 수준에 그친 것이었다. 저자인 동국대학교 송은석 교수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17세기 전반에 활동한 조각승들을 다섯 개의 유파로 나누고 그 계보를 완성하는 데에까지 나갔다. 단순히 불상을 조각했던 승려가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조각승, 스타일을 추구했고 개성이 담긴 양식을 후대에 계승해나갔던 최초의 작가 그룹으로서 조각승 유파가 갖는 의미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저자가 조선시대 불상에 대해 연구한 것은 2001년부터이다. 십여 년의 연구 기간 동안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며 직접 불상을 확인하였다. 저자가 조사한 17세기 불상은 수백여 점에 이르는데, 그중에서 조각승 유파의 계보를 완벽히 밝혀 책에 실은 것은 총 142점이다. 이 결과물을 얻기까지, 수백여 점의 개별 불상 양식을 정리하고 그 안의 복장발원문을 모두 옮기고 해석하는 작업을 거쳤다. 특히 복장발원문은 송광사 성보박물관장 고경스님과 함께 오랜 시간 석문한 끝에 조각승 유파의 계보를 담은 데이터베이스로 정리할 수 있었다(369쪽부터 |부록| 조선후기 불상 복장발원문). 또한 직접 촬영한 방대한 양의 불상 사진 역시 기존 연구와 차이점이다. 정면과 측면을 고루 촬영한 192컷의 도판을 보여주고 일일이 해설함으로써 유파 간의 특징을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수립한 유파별 양식을 기준으로 발원문이 조사되지 않은 불상들까지도 조각승을 추정하였고, 그 결과 17세기 조각승 유파와 그들이 조성한 불상에 대한 체계를 완성하게 되었다.
조각승의 계보를 통해 정리한 17세기 조선의 불교조각사
우리나라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주요 불상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 10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시기 파괴된 불상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규모의 수요를 충족시켜준 이들은 승려들이었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활동하며 몇 개의 불상을 조각한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독자적인 집단을 형성했다. 유파의 수장인 수조각승 아래 많게는 30명에 이르는 전문적인 조각가 승려들이 있었고, 일정한 지역을 기반으로 지역 내 사찰을 돌아다니며 불상을 조성했다.
이 책은 17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다섯 개의 조각승 유파와 그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한국 불교조각사 최초로 조각승을 유파별로 정리하고 작품의 특징을 분석하였다. 수조각승 헌진과 청헌, 응원과 인균, 수연, 법령, 무염이 이끌었던 다섯 유파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켜 불상들을 대량으로 조각해냈다. 개별 창작자를 넘어 집단 창작 체계를 구축한 조각승 유파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다.
지금 우리가 절에서 보는 불상, 이것을 만든 사람은?
조선시대 중반, 임진왜란이라는 재앙이 전 국토를 휩쓸고 지나갔다. 궁궐은 물론 사찰까지 모조리 불타버린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전국적 재건이 시작되는데 이때 사찰도 함께 재건된다. 지금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절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전국적으로 사찰이 다시 지어지면서 불상 역시 대량으로 요구되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불상들이 조성되었고, 이때 만들어진 주존불들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이때 대량의 불상을 조성한 사람들은 조각가도 기능공도 아닌 승려였다. 전문적으로 조각만을 하는 장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록에는 이들을 화원(畵員) 혹은 화사(畵師)로 칭하고 있으나 실제 이들의 직업은 승려였다. 현대 학계에서는 이들을 조각승(彫刻僧)이라 부르고 있다.
서양의 작업공방을 방불케하는 조각승들의 작업체계
대량의 불상이 동시에 필요했던 시대적 상황은 당시의 조각승들로 하여금 공동 작업이라는 작업 방식을 채택하게 한다. 조각승들이 집단을 이루어 돌아다니며 공동으로 불상조성작업을 한 것이다. 이 집단은 수화사(首畵師)로 불리는 우두머리 조각승 아래 차화사(次畵師), 그리고 일반 조각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본문 84쪽). 수화사는 작업을 실질적으로 진행하는 감독으로, 가장 중요한 밑그림 그리기와 마무리 작업을 맡았다. 수화사가 밑그림을 그리고 나면 차화사 및 나머지 조각승들이 수화사의 감독하에 전체 통나무를 깎아 몸체를 만들었다. 그 후 얼굴, 다리, 옷주름 등 부분조각을 마치면 마지막에 수화사가 전체적으로 마무리를 한 후 작업을 완성하였다. 마치 마스터는 작품을 수주받고, 작품의 얼개를 구성하고 밑그림을 그리면 제자들이 물감을 개어 채색작업을 도왔던 서양의 작업공방처럼, 17세기의 조각승들은 집단 작업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였다.
다섯 유파의 성립
수조각승 아래 공동으로 작업을 진행하면서, 조각승들은 자연스레 수조각승의 작풍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조각승 집단의 유파가 성립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국미술사에서 그 구체적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첫 작가 그룹이 형성된 것이다. 1610년대에 현진.청헌을 수조각승으로 한 유파의 성립을 시작으로, 응원.인균파, 수연파, 법령파, 무염파, 이렇게 다섯 유파가 17세기 전반에 확립되었다. 가장 규모가 큰 집단의 경우 3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컸던 작가 그룹-유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들이 경제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수량의 불상들이 지속적으로 조성되어야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의 활발한 활동은 당시에 충분한 사회적.경제적 여건이 주어져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다섯 유파의 불상은 어떻게 다를까
불상들을 유파별로 구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유파별 고유의 작업방식은 얼굴, 몸체, 손, 귀, 옷주름의 표현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얼굴 표현방식에서부터 유파 간에 차이가 있다. 현진.청헌파가 만든 불상은 넓적한 사각형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는 턱 양끝이 직각이고 얼굴 전체가 거의 직사각형을 이루는 수연파의 양식과 비슷하다. 이에 반해 응원.인균파의 얼굴은 뺨과 턱에 통통하게 살이 올라 양감이 강조되어 있다. 법령파는 직사각형의 얼굴이지만 입속에 무언가 물고 있는 것 같이 아래쪽 뺨이 불룩하게 나와 있는 점이 특징이다. 한편 무염파의 얼굴은 넓적하면서도 양감이 잘 표현되어 볼과 턱이 튀어나와 있고 코 역시 이마에서 곧바로 뾰족하게 나와 있다.
이외에 몸체와 옷주름에서도 각 유파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불상은 육중하고 건장한 신체를 갖고 있는데 반해, 수연파와 법령파의 불상은 하체가 비교적 빈약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 불단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이 물결무늬인지, 왼쪽 어깨로 흘러내린 대의자락이 'U'자 모양인지에 따라서도 각각 응원.인균파, 현진.청헌파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한국 조각사에서 처음으로 조각가라는 개념을 부각시킨 조각승
조각승은 처음으로 한국 조각사에서 ‘작가’라는 개념을 부각시킴으로써 한국 미술사에 중요한 의미를 던진다. 17세기의 조각승들은 자신들이 조성한 불상 안에 제작연도, 제작에 참여한 조각승 명단 등을 기록한 종이를 넣어 봉안했다. 복장발원문(腹藏發願文)이라 불리는 이 기록을 통해 비로소 우리의 미술사에서 그 이름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최초의 조각가들이 등장한 것이다. 불상의 배 안에 들어있는 복장발원문에는 조각가와 후원자, 봉안처 등 불상 제작과 관련된 모든 정보가 기재되어 있어서 불상 제작에 참여한 조각승 명단을 정확히 제공해준다.
조각승 유파에 주목, 계보를 완성하기 위한 연구
기존에도 조각승에 관한 연구는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이루어진 연구들은 개별 조각승과 불상, 조성 연대를 소개하고 이제까지 밝혀진 조각승들의 목록을 정리하는 수준에 그친 것이었다. 저자인 동국대학교 송은석 교수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17세기 전반에 활동한 조각승들을 다섯 개의 유파로 나누고 그 계보를 완성하는 데에까지 나갔다. 단순히 불상을 조각했던 승려가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조각승, 스타일을 추구했고 개성이 담긴 양식을 후대에 계승해나갔던 최초의 작가 그룹으로서 조각승 유파가 갖는 의미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저자가 조선시대 불상에 대해 연구한 것은 2001년부터이다. 십여 년의 연구 기간 동안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며 직접 불상을 확인하였다. 저자가 조사한 17세기 불상은 수백여 점에 이르는데, 그중에서 조각승 유파의 계보를 완벽히 밝혀 책에 실은 것은 총 142점이다. 이 결과물을 얻기까지, 수백여 점의 개별 불상 양식을 정리하고 그 안의 복장발원문을 모두 옮기고 해석하는 작업을 거쳤다. 특히 복장발원문은 송광사 성보박물관장 고경스님과 함께 오랜 시간 석문한 끝에 조각승 유파의 계보를 담은 데이터베이스로 정리할 수 있었다(369쪽부터 |부록| 조선후기 불상 복장발원문). 또한 직접 촬영한 방대한 양의 불상 사진 역시 기존 연구와 차이점이다. 정면과 측면을 고루 촬영한 192컷의 도판을 보여주고 일일이 해설함으로써 유파 간의 특징을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수립한 유파별 양식을 기준으로 발원문이 조사되지 않은 불상들까지도 조각승을 추정하였고, 그 결과 17세기 조각승 유파와 그들이 조성한 불상에 대한 체계를 완성하게 되었다.
저 : 송은석
동국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불교미술사를 전공하였다. 2007년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에서 “17세기 조선왕조의 彫刻僧과 佛像”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태동고전연구소 연수원, 호암미술관과 삼성 미술관 리움 선임연구원, 송광사성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거쳐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아시아문화협회(Asian Cultural Council) 의 기금연구원을 지냈다. 주요 논문으로 “17세기 彫刻僧 玄眞과 그 流派의 造像”(2004), “조선 후기 佛殿 내 儀式의 성행과 佛像의 造形性”(2009), “Reading a Bodhisattva Image from 17th Century Korea”(2011) 등 조선시대 조각에 관한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