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재 · 학술
선진국 사례, 정책의 이전과 확산
어떤 일이 터지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외국 사례를 찾는다. 그래서 ‘선진국 사례’는 정책 보고서에 빠지지 않는 항목이다. 비슷한 문제를 먼저 겪은 사람이 어떻게 해결책을 찾았나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국가 단위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며, 작은 단위가 큰 단위를 참고하는 것만도 아니다. 지방자치단체가 광역자치단체의 정책을 연구하기도 하지만 중앙정부가 지방정부를 연구하기도 한다. 이것은 또한 정책이 움직이는 화살표의 방향과도 같다. 정책은 국가와 국가, 지역과 지역 사이에서 경쟁하고 모방하며 이전되고 확산되기 때문이다. 갈등의 발생과 인식, 해결에 대한 관심을 정치학과 국제정치학이라 부른다면, 이러한 정책의 이전과 확산은 정치학과 국제정치학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 중국, 일본, 동아시아 3국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근대화라는 목표를 위해 급하게 추격전을 벌여야 했고, 이와 같은 추격의 경향은 여전히 강력하다. 이들에게 정책을 들여오고 확산시키는 일은 선택의 문제였다기보다는 필수의 측면의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책이 이전되고 확산되는 모습은 세 나라가 모두 동일하지 않다. 각국이 처한 정치경제적 상황은 물론 사회문화적 차이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국가에서 정책의 이전과 확산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는 일은 의미를 갖는다. 이들 세 나라는 무엇을 문제라고 보고 있으며, 어떤 것을 이전시키고 확장시켜서 해결하려고 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분석에 대한 시도이다.
중앙이 지방을 연구하는 중국
청년 실업문제는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경제성장률이 최근에 와서야 10% 밑으로 내려온 중국은, 여전히 활발한 투자가 진행되고 있는 국가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대졸자 취업난은 큰 골칫거리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허난성 정부는 획기적인 대책을 내놓는다. 대학에서 농업이나 농촌과 관련이 되는 과를 전공하고 졸업한 이들을, 대학생촌관이라는 이름으로 2년간 지방정부가 고용해 농촌에 파견한 것이다. 이들은 농촌에 가서 새로운 농업기술을 전파하고, 낙후된 제도적 인프라를 혁신하고, 농민 재교육을 통해 농업 이외의 새로운 부가가치를 생산하게끔 도왔다.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은 이들로 인해 활력을 되찾았고, 실제 농촌경제를 향상시키는 데 있어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촌민들은 대학생촌관이 농촌에 더 머물기를 원했고, 대학생촌관들 역시 긍지를 가지고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사례는 곧 대학생 취업난 해소와 농촌 개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성공적인 정책으로 평가되었다. 중국 중앙정부에서 이에 대한 검토를 시작한다.
중앙정부는 대학생촌관 제도를 연구해 전국으로 확대 실시한다. 곧이어 대학 졸업생들을 상대로 대규모 신청을 받아 대학생촌관을 선발한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새 대학생촌관들 역시 낙후된 전국 각지의 농촌으로 파견한다. 야심차게 실시된 이 정책, 그런데 지방정부에서 시행되었을 때처럼 모두가 행복하게 마무리가 되었을까? 안타깝지만 그렇지 못했다.
제도가 중앙정부로 이전되면서 기존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소에 새로운 것들이 추가되었는데, 이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지방정부에서 시행될 당시 정책의 핵심 요소는 농촌과 대학생촌관의 연계성이었다. 농촌, 농업과 관계가 있는 대졸 취업준비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앙정부로 이전되면서 정책의 핵심 과제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의 빠른 취업으로 옮겨간다. 그러다보니 농촌과 크게 관계도 없는 전공을 한 대학생촌관들이 농촌으로 파견되었고, 파견된 대학생촌관들이 오히려 농촌의 일상 업무에 방해가 되었다. 대학생촌관에 지원한 이들도 괜찮은 월급, 기간제이기는 하지만 공무원의 신분 보장, 임기가 끝나면 취업 시 가산점도 부여된다는 점에 매력을 느낀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낙후된 농촌의 개발은 그리 중요한 목표가 아니었기에, 대학생촌관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부족했다. 당연히 농촌에서 이들이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웠다.
결국 지방정부의 제도를 연구해 중앙정부가 시행한 정책은 이전과 확산 과정에서 끼어든 요소들로 인해 변형되었고, 실패한 정책이 되었다. 이는 중국은 넓은 국토, 많은 인구, 다양한 문화라는 제약 조건에 지역적 격차도 심해 중앙에서 단일한 정책을 먼저 제시하기보다는, 지방에서 실시된 성공적인 정책들을 보완해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과정으로 발전해왔다는 기존의 중국 발전 모델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유리한 조건이 빚어낸 잘못된 정책이전의 경로
일본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전 세계 이동통신시장에서 일본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이동통신 정책이 어떻게 이전되고 확산되어 가는지를 들여다보면 그 이유가 보인다. 이동통신의 경우 이제 누가 더 높은 기술력을 보유하느냐보다는 누가 자신의 기술을 시장에서 표준화시킬 것이냐 하는 싸움이 되었다. 어떤 방식의 이동통신이건 기술적 차이는 사실 일반 사용자에게는 큰 차이로 다가오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방식이 표준화가 되느냐가 이동통신사업 성패의 관건이 된 것이다. 일본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립화의 길을 택한다.
전 세계 이동통신 사업자들은 저마다의 강점을 가지고 경쟁에 돌입하는데, 일본은 자신만의 강점을 가지고 안전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앞선 기술력과 큰 내수시장, 대기업집단의 담합과 이를 통제하는 공기업이라는 조건들은 일본 내부에서만 사업을 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외국의 경쟁자들이 일본 시장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규제는, 역으로 일본 기업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게 된다.
뒤늦게 세계시장에 진입하려는 노력을 하지만 기존의 정책환경에 익숙해져 있는 시장은 움직이지 않았고, 현재 일본 이동통신시장은 전 세계의 흐름과는 동떨어져, ‘갈라파고스의 앵무새들’처럼 독특한 형태의 변종으로 남게 되었다. 기술력을 가졌음에도 정책의 초기 의도가 경로를 형성하고, 그에 따라 확산되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자신을 고립시켜간 것이다. 일본이 처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위기들은 사실 이러한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합리적인 효용분석 vs. 주도권자와 사회적 맥락
외국의 정책을 도입해서 국내에 적용함에 있어 누가 도입할 것이며, 어떤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맥락이 속에서 도입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은 한국의 복지제도의 변천사를 통해 파악해볼 수 있다. 외국 정책의 검토와 도입, 이전과 확산은 매우 학문적이며, 객관적인 시각을 통해 진행될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개발주의가 지배하던 시대 한국의 복지제도는 일본의 정책을 들여온 것인데 이것은 복지 그 자체에 문제의식이 있었다기보다는 연금을 통해 강제로 자본을 형성하려는 의도에 기인한 것이었고, 경제관료들이 이 흐름을 주도했다. 하지만 민주화시대로 들어오면서 상황은 바뀌어 보편적 복지에 기반한 정책을 도입하게 되는데, 이것은 학계와 시민운동계가 주도하게 된다. 이와 같은 분석은 김대중 정권의 연금개혁이 왜 세계은행 방식이 아니라 ILO 방식이었는지, 노무현?이명박 정권에서 제도적 기반이 미비한 상태에서도 영국식의 사회투자정책을 시도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게 도와준다.
외국의 정책을 도입함에 있어 무엇이 더 유리하고 불리한지에 대한 합리적 판단보다는, 누가 정책을 주도하고 그가 무엇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사람인지가 더 높은 영향력을 미치며 그 시점에서의 사회적 맥락이 어떤 식의 영향을 미치는지가 정책의 모습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한국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다양한 시선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관점
이 외에도 중국의 탄소거래시장은 왜 중앙정부의 노력에 불구하고 활성화되지 못하는지, 일본에서 분권화 개혁이라는 담론은 정말 ‘개혁’적인 것인지, 한국의 지방자치제는 어떻게 정책 혁신을 만들어가는지에 대한 분석도 진행된다. 모두 정책의 이전과 확산이라는 틀 속에서 유지되지만 각각의 문제에 접근하는 시간만큼은 다양하다. 그리고 다양한 시각이 한 곳에서 이야기되며 만들어내는 종합적이고 새로운 관점은 그래서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다.
편 :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최근작 :<글로벌 냉전의 지역적 특성>,<동아시아의 보편성과 특수성>,<국제정치학 방법론의 다원성>
편 : 신상범
연세대학교 국제관계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