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재 · 학술
21세기 한국외교와 국가이익의 재구성
냉전체제의 종식 이후 세계질서의 핵심 키워드는 탈이념, 상호의존이었다. 21세기 세계질서는 여기에 한 가지 특징을 더하게 되었는데, 바로 ‘동아시아 시대의 도래’이다. 중국의 급속한 부상은 단극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이른바 ‘무극의 시대’를 열고 있다. 그리고 무극화의 국제관계는 새로운 형태의 행위주체와 정책 목표 및 수단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의 시기에 한국의 국가이익은 무엇이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기본전략은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안보와 평화, 경제적 번영, 그리고 국가적 위상을 제고하기 위한 전략들을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두루 고찰하고 있다. “21세기 세계질서와 한국의 국가이익”이라는 대주제로 연구자 19명의 논고를 재구성했다. 특히 교육과 외교현장에서의 필요를 십분 반영하여 21세기 급변하는 세계질서하에서의 국가전략을 총괄하는 입문서로 기능하도록 기획되었다.
21세기 세계질서의 향방과 한국의 국가이익
21세기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에서 2차대전 이후 냉전 시대의 도래나, 탈냉전 이후 미국 일극 시대의 도래와 버금가는 국제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 변화의 핵심에는 중국의 부상이 있다. 지금까지 세계질서를 이끌어 왔던 서구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의 경제가 정체현상을 보이는 반면, 중국을 중심으로 한 BRICs 국가들의 성장이 지속되면서 국제질서는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서서히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각종 연구소들은 GDP 총량으로 보면 2030년경이면 중국의 경제규모가 미국을 초월해 세계1위로 등극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한 국제정치학자들은 이 힘의 재편이 결과적으로 무극체제로 수렴해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무극체제는 의미 있는(meaningful) 힘을 가진 중심(center)이 다수인 체제인데, 여기서 중심은 국민국가(nation state)뿐만 아니라 지역 및 지구적 기구들, 비정부기구, 회사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무극화의 국제관계는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냉전적 양극화의 세계나 미국 중심의 일극적 세계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특히 새로운 형태의 행위주체와 정책 목표 및 수단을 요구하고 있다. 전통적인 민족국가 중심적 국제관계가 비정부기구, 초국가적 행위자, 국제제도를 포함한 다양한 행위주체들과 중첩되면서, 정책목표가 전통적인 위협에 대응하는 군사적 안보에서 인권, 환경, 식량, 의료보건 등 포괄적 안보나 인간안보 등으로 이행하고 있다. 또 정책수단 면에서도 군사력과 같은 경성권력보다는 비군사적인 연성권력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의 국제관계에서는 위협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식별 자체가 쉽지 않다. 적과 동지의 구별이 쉽지 않고, 협력과 대립의 좌표축을 세우기도 쉽지 않다. 자연히 적과 동지의 분명한 구분에 의존했던 냉전적 동맹관계로는 대처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냉전구조의 틀에 갇혀 무극적 세계의 도래에 따른 국가전략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족했다. 그로 인해 우리의 국가전략은 여전히 한미, 한일, 한중, 한러 등 양자관계의 틀에 얽매여 있다.
물론 이러한 양자관계의 국가전략은 그동안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힘이 상대화됨과 더불어 동아시아 시대가 도래하는 지금 과연 이러한 전략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냐의 문제가 바로 우리의 국가전략이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조적 변화의 시기에 우리의 국가이익은 무엇이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기본전략은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국가이익 실현을 위한 전략과 과제
한미동맹의 공고화와 협상전략
미국의 힘에 의한 패권적 안정(hegemonic stability)에 의존해 왔던 동아시아의 질서가 중국을 중심으로 한 BRICs의 등장으로 다극화의 양상을 보임에 따라 지금까지 동맹전략에 의존해왔던 국가전략 패턴이 앙탕트(entente), 즉 협상전략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협상전략은 국가이익의 차이를 인정하는 인식을 바탕으로 서로 타협할 수 있는 이슈나 문제들을 동맹에 의존하지 않고 해결해 나가는 협조관계 구축을 목표로 하는 전략이다. 동아시아 시대의 도래로 인해 안보이익과 경제이익이 상충되는 속에서 우리에 요구되고 있는 것은 해양전략이냐 대륙전략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이러한 이분법적 대립을 극복하는 전략을 마련할 것이냐가 문제라 할 수 있다.
호혜적인 한미전략동맹 발전
한반도의 안보와 평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앙탕트적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미동맹의 새로운 재편이 불가피하다. 한반도 평화와 안정, 그리고 핵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 유용한 대안일 수 있고, 이를 위해서는 한미동맹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 시대의 도래에 대비하는 한미 간의 성숙한 동맹은 미국에 추종하는 형태가 아니라 서로 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러한 협력관계에 토대를 둔 동맹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형태에서 미래 비전에 따른 상호협력적인 동맹으로의 재조정을 의미한다.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의 실질화
북한문제, 동북공정, 해양마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현재 한중관계는 아직 해결해야 할 많은 난제들을 안고 있다. 선린우호관계의 확대ㆍ심화가 무엇보다도 시급하지만 이러한 양국 간의 관계로 문제가 쉽게 해결될 시대는 아니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의 기본전략은 중국이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는 환경을 구축하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중 양국 간의 공통이익에 착목한 양국관계의 확대ㆍ심화ㆍ발전인 동시에 중국이 한반도문제에 건설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다자적 협조체제의 구축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관리와 통일외교 추진
새로운 대북정책은 포용정책과 비포용정책의 장단점에 대한 점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난 정부의 포용정책은 남북관계의 진전을 가져왔지만 북한의 일방주의에 끌려다녔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우며, 이명박 정부의 비포용정책은 북한의 자세를 고치는 ‘학습효과’는 있었지만 남북관계를 파탄시켰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여기서 우리가 심각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비포용정책이 북한의 변화를 강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정세가 남북의 차원을 넘어 국제화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반도문제가 다시 국제적 세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포용정책을 통한 한반도문제의 한반도화 전략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양자관계의 심화와 다자적 지역협력체제 구축
현재 동아시아에는 지역협력의 공통 기반이 될 수 있는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가 확대되고 있다. 역내 무역이 60%를 넘는 EU의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40%대 중반에 머물고 있는 NAFTA 수준보다 높은 50%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런 지역협력 기반을 확대 발전시킬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무역이나 투자와 같은 경제적 기능과 정치ㆍ안보 기능을 한데 묶기보다는 따로 따로 하는 기능적인 ‘다자협력의 틀’을 만드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