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재 · 학술
최근 30여 년의 성과를 담아낸 고인류학 개설서
고인류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우리나라에서 모처럼 발간된 인류의 기원과 진화 문제를 다룬 개설서이다. 지난 30여 년간의 자료 발굴과 연구, 유전자 분석을 통해 제시된 세계적인 학자들의 복잡한 주장과 이론, 가설을 총체적으로 소개한다. 약 800만 년 전 고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하여 오늘날의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하고, 새롭게 부각된 학계의 논쟁점들을 제시한다. 특히 20세기 말 활발해진 유전자 분석 등 새로운 연구방법에 의한 고인류학의 풍성한 성과들을 담고 있다.
침팬지는 고릴라보다 사람과 더 가깝다
20세기 말 활발해진 유전자 분석으로 고등영장류의 분류체계는 전면 수정이 불가피해졌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때까지 영장류의 분류는 해부학적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전자 분석 결과 침팬지는 고릴라보다 오히려 사람과 더 가까운 영장류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동안 침팬지는 <사람상과> 중 <사람과>와는 다른 고릴라속, 오랑우탄속과 함께 <유인원과>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1990년대 이래의 분류체계에서는 <사람과> 중 <오랑우탄아과>, <고릴라아과>와 구분되는 <사람아과> 중에 사람족과 구분되는 침팬지족으로 분류되고 있다. 말하자면 오랑우탄과 고릴라는 훨씬 일찍 사람-침팬지 그룹과 갈라졌고, 침팬지는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갈라졌다는 것이다.
이 같은 분류체계의 변화와 함께 저자는 여기서 용어의 혼란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의 예로 ‘유인원(ape)’의 개념이 크게 달라졌다. 전통적으로 이 말은 <유인원과>에 속하는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을 지칭했지만 새 분류체계에선 <유인원과>가 아예 사라졌다. 그 대신 사람과 침팬지는 <사람아과>로 묶이고, 이 둘은 다시 고릴라, 오랑우탄과 함께 <사람과>로 묶이고, 나아가 <사람과>는 <긴팔원숭이과>와 함께 <사람상과>를 이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인원’은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을 지칭하는 대신 긴팔원숭이와 사람까지 포함해 <사람상과>에 속하는 모든 고등영장류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사람과>에 속하는 개체들을 가리키는 용어인 ‘hominid’는 사람과 함께 유인원이라 불리던 세 영장류 모두를 가리키게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용어의 변화는 라틴어를 모체로 하는 서구어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나 한국어를 비롯한 비서구어에서는 용어를 새로 고안하기에 어려움이 많다고 말한다. 이제 ‘유인원’은 ‘ape’의 적절한 대역어가 될 수 없고 ‘hominid’도 사람만이 아니라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도 지칭하는 말이 되었으므로 적절한 용어를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완전한 직립보행 고인류, ‘루시’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은 누구이며, 언제 지구상에 처음 등장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진화해 왔을까. 고인류학계는 아프리카 등 세계 여러 지역에서 발굴된 화석자료 분석을 통해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내놓고 있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설명체계는 아직 없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발굴된 화석자료가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부위인 뼈와 이빨이 주로 파편 형태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인체의 일부만 가지고 전체의 모습과 생활방식을 파악해 내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새로운 화석이 발견되면 기존의 이론은 수정이 되고, 화석에 대한 해석과 명칭도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기도 한다. 일례로 1992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된 440만 년 전의 고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미두스’라는 학명을 얻었지만, 나중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전의 다른 고인류로 여겨져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라는 학명을 새로 얻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연구자의 동의를 얻고 있는 최초의 고인류는 차드의 사헬에서 발견된 사헬란트로푸스로 600만-700만 년 전에 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잇달아 오로린 투게넨시스, 아르디피테쿠스 카다바가 발견되었다. 그 다음 등장한 것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으로 410만-420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나멘시스, 390만-300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350만-320만 년 전의 케냔트로푸스 플라티옵스가 있다. 그 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여러 유형으로 분화하는 단계를 거쳐 이백 수십만 년 전 <사람속> 계보에 속하는 고인류인 호모 하빌리스가 등장하고, 이어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다.
저자는 이러한 고인류의 계보에서 <사람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직립보행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두 발 걷기와 직립자세라는 기능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두 가지 특징을 포괄해 지칭하는 말이다. 오랑우탄은 어쩌다 뒷발로 서서 몇 발자국을 걷기도 하지만 나무타기가 주요 이동양식이고, 침팬지와 고릴라는 ‘주먹걷기’라는 운동양식으로 이동한다. 이는 뒷발을 주요 이동수단으로 삼지만 팔도 어느 정도 사용하는 방식이다. 직립보행의 양식은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두 발로 걷기는 했으나 발이 아직 손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무를 타고 오르내리는 생활에서 오래전에 벗어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완전한 직립보행은 ‘루시(Lucy)’ 화석으로 유명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에서 비로소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기원설 대 다지역기원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늦어도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등장했다는 것이 최근 이루어진 연구의 결론이다. 이들은 까마득한 선조들이 그랬듯이 아프리카를 벗어나 빠른 속도로 남극을 제외한 지구상의 거의 모든 곳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40만-30만 년 전에 출현해 2만 4000년 전까지 살았던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와 공존하면서 유전자 교류를 하기도 했다.
현재 고인류학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모든 호모 사피엔스 집단은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인가, 아니면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앞의 입장을 아프리카기원설 또는 대체설이라 하고, 뒤의 입장을 다지역기원설이라고 하는데, 이는 특히 중국학계가 선호하고 있는 주장이다. 학계에서는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호모 사피엔스가 각지로 확산된 다음 고유한 지역집단으로 진화하고, 다시 그러한 집단 사이에 유전자 교류가 있었다는 절충안이 힘을 얻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구석기고고학 전공인 저자는 “정규과목으로 고인류학 강의가 개설되어 있는 대학도 없고, 설령 개설하려 해도 강의를 끌고 나갈 수 있는 전문가를 구할 수 없는 우리 현실에서 새로운 정보와 지식 및 연구현황의 윤곽이라도 소개해야 할 책임감 때문에 이 책을 펴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척박한 고인류학 환경에서 전공 희망자는 물론 일반인들이 인류의 기원과 진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폭넓은 이해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저 : 이선복
서울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 인류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에 조교수로 부임해 2022년 정년퇴임하였으며, 재직 중 한국, 베트남, 아제르바이잔 등에서 발굴을 지휘했다. 주로 구석기 시대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고, Current Anthropology, Science, Nature를 비롯한 국내외 학술지에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주요 저역서로 『고고학 개론』(1988), 『동북아시아 구석기 연구』(1989), 『이선복 교수의 고고학 이야기』(1996, 2005), 『벼락도끼와 돌도끼』(2003), 『구석기 형식분류』(번역, 2012), 『방사성탄소연대 측정법』(번역, 2013), 『동물고고학 입문』(번역, 2014), 『고고층서학의 기본원칙』(번역, 2016), 『인류의 기원과 진화』(제2판, 2018), 『지질고고학 입문』(2018), Archaeology of Korea(2022) 등이 있으며, 『한국 고고학 강의』(2007, 2010) 편찬에 집필과 책임편집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