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재 · 학술
고고학과 민족주의의 부적절한(?) 관계
‘고고학’과 ‘민족주의’만큼 서로 다르고, 그러면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을까.
오직 발굴된 유물과 그를 통해 밝혀진 객관적 사실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가장 정직한 학문이라고 생각되는 고고학. 근대 이후 정치적.사회적 쟁점 중 가장 핵심적인 화두였으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민족주의. 마치 산사에 칩거한 선승과 속세의 정쟁에 휘말린 정치인만큼이나 서로 달라보이는 이 둘은,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해 온 애증의 관계이다.
하긴 우리가 어릴 적 즐겨보던 [인디애나 존스]만 봐도 열심히 연구나 하며 평온하게 살고 싶은 고고학자 인디애나 존스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항상 고고학적 유물로 인해 국가적 위기가 생기고 이를 위해 고고학자가 목숨을 거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가. 유물 하나가 적대국으로 넘어간다고 해서 국가의 존속이 위험하게 되는 상황이 어이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일이 그저 영화 속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여러 역사적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고고학이 민족주의를 ‘과학적으로’ 강화하고 지탱하는 민족주의 고고학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나치 독일하에서 과거를 정치적으로 조작한 사례이다. 독일의 언어학자이자 선사학자였던 구스타프 코신나는, 독일 고고학에서 민족적 해석을 주도하였고 이를 나치 독일이 파시스트적이고 민족주의적으로 이용하도록 한 대표적 인물이다. 코신나가 개발한 ‘취락 고고학’이라는 민족적 패러다임은 유물 형식은 문화를 식별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고, 명확하게 구분 가능한 문화 지역은 과거의 부족이나 민족 집단의 취락 지역을 반영한다는 것이 그 기본 전제였다. 민족주의적 색채와 관련하여 그의 방법론 중 가장 핵심을 이루는 것은 직계보학적 방법인데, 이를 이용하여 역사적으로 알려진 집단의 기원을 선사시대의 가상 집단에 대응시키고자 하였다. 코신나는 이 방법을 통하여 노르딕, 아리아, 게르만 우수 인종의 혈통을 인도-유럽인(또는 ‘인도-게르만인’)으로 연결시키는 시도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아리아 ‘인종’에 태고적 성격을 부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리아 ‘인종’이 새로운 지역으로 계속 확장함으로써 역사 발전에 결정적이고 창조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며, 게르만족의 인종적?문화적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고고학과 민족주의가 여러 상이한 맥락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코신나의 고고학 연구에 대한 비판이 거세진 이후에도 그의 연구방법은 많은 고고학적 연구에서 사용되었다. 트리거의 경우 ‘대부분의 고고학적 전통은 그 지향점이 민족주의적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민족주의 고고학’을 고고학 특유의 한 유형으로 보았다. 또한 여러 사례 연구를 통해,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고 영토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고학을 이용하는 예가 일반적으로 추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세기 덴마크에서는 민족적, 목가적 풍경을 구성하는 데 분묘나 고인돌 같은 선사시대 기념물이 이용되었으며, 워새과 같은 고고학자들이 독일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식을 재건하는 데 공공연히 나서기도 하였다.
또한 고고학은 민족이나 국가뿐만 아니라 훨씬 더 복합적인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도 관여하였으며,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할 때뿐만 아니라 약소국이 해방 이후에 자신들의 문화적 재생과 국가 건설을 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통일된 국가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한 이런 시도는 이전의 피지배 주민들에게 정당한 권력을 부여한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때로는 새로운 국가 내에서 민족적 다원주의를 억압하고 토착 소수민의 존재를 계속 부정하는 문제도 있다.
이처럼 고고학은 현대의 문화 정체성과 복합적이고 광범위하게 교차되며, 대개는 본질적으로 공공연한 정치적 성향을 띠고 있다.
민족주의 연구는 현대 고고학에서 매우 논쟁적인 영역이다.
이처럼 민족주의와 고고학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서로에게 영향을 끼쳐왔다. 고고학만이 객관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방법론을 통해 과거에 대해 정당하고 권위 있게 접근할 수 있다는 주장에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과거에 대한 다원적이고 다양한 해석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객관성 개념의 지지를 받는 경험주의자의 입장으로 물러서는 것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외부의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결국 과거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시안 존스Sian Jones의 <민족주의와 고고학The Archaeology of Ethnicity>은 위에서 이야기한 여러 민족주의와 고고학에 대한 논쟁들의 갈피를 잡고 갈무리하는 데 가장 적합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민족’의 실체는 무엇인가, 고고학 자료를 통해 민족 집단의 존재와 경계를 밝혀낼 수 있는가와 같은 민족주의 연구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들을 학사적 맥락의 고찰에서부터 정교한 이론적 논의, 그리고 실제 고고학 사례의 분석에 이르기까지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또한 학제 간 연구에 관심을 기울여 인류학과 여타 사회과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이론을 폭넓게 소개하고 있다. 고고학자의 저술임에도 불구하고, 민족 정체성과 관련된 인류학의 최신 이론들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고고학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전반의 독자들에게도 매력적이다.
특히 현대 인류학의 정체성 이론을 소개한 3, 4, 5장은 그 자체만으로 별개의 이론서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심도 있고 체계적이다. 현대 인류학의 정체성 이론을 나열하여 소개하는 다른 문헌들과 달리, 이 책은 각 이론의 학사적 배경과 주요 이론가들의 논지를 자세히 고찰하고 있다. 나아가 각 이론적 입장이 갖는 장점과 단점을 분석하여, 이분법적인 이론적 대립구도를 극복하려는 통합적 관점을 제시한다. 따라서 민족성이나 정체성에 관한 인류학 이론을 접하고자 하는 일반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도 별도로 추천할 만하다.
현대 인류학의 민족성 이론이 고고학 연구에 갖는 함의를 모색한 내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의 물질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실체로 여기고 있는 ‘고고학적 문화’와 ‘민족’ 또는 ‘주민 집단’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 점이나 고고학적 문화를 과거 특정 민족 또는 주민 집단과 관련짓는 과정에서 그동안 관행적으로 적용해 왔던 방법론에 대해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점은 다소 당혹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고고학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의문시되고 논의되어 온 주제라는 점에서 한국 고고학에서도 마땅히 제기되어야 할 질문이자 풀어나가야 할 과제라 생각된다.
영남문화재연구원 학술총서
세계의 고고학 연구의 정수를 집약하는 고고학 번역서 시리즈
<민족주의와 고고학>은 영남문화재연구원 학술총서의 두 번째 책이다. 영남문화재연구원 학술총서는 국내외 고고학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들을 추려내어 그 주제에 맞는 가장 권위 있는 책을 선별하여 번역 출판하는 기획시리즈이다. 주제 선정 및 번역서 선정 과정이 국내의 저명한 고고학 전문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그 번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학술총서 한 권 한 권은,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훌륭한 고고학 책들을 학계에 소개하는 교과서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미 출간된 영남문화재연구원 학술총서 1권 <현대 고고학의 이해>(콜린 렌프류.폴 반 지음, 이희준 옮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인기 있는 고고학 교과서로서, 많은 분량과 적지 않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이 분야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수적이고 기초적인 책으로 인식되고 있다.
<민족주의와 고고학>에 바로 뒤이어 출간되는 <현대 고고학 강의>는 비교적 방대한 분량의 <현대 고고학의 이해>를 좀더 고고학 분야 입문가들에게 적합하도록 새롭게 정리하고 축약한 책으로, 현장에서 교육용 교재로 사용하기에 더욱 알맞은 책이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사회 고고학의 기초>(Gordon Child), <고고학에서의 통계>(Robert D. Drennan), <고고학사>(Bruce G. Trigger), <일본고고학> 등 묵직한 책들이 차례로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저 : 영남고고학회
<영남고고학>
역 : 한건수
미국 UC Berkeley 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강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이민학회 부회장, 한국국제이해교육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아프리카인의 국제이주와 난민이동, 한국의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 다문화가족, 여성인신매매, 문화다양성 관련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주요 저서 및 논문으로는 <다문화사회의 이해>(2007, 공저), “한국 에티오피아 이주민의 이주동학: 경향, 유형 및 난민연계”(2014), <한국다문화주의의 성찰과 전망>(2015, 공저)이 있다.
역 : 이준정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의 위스콘신 대학교 인류학과에서 고고학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이다. 과거의 생태경제 양상에 대해 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 및 논문으로 <선사 농경 연구의 새로운 동향>(공저), <패총의 고고학>(공역), <수렵.채집 경제에서 농경으로의 전이 과정에 대한 이론적 고찰>, <패총 유적의 기능에 대한 고찰: 생계.주거 체계 연구를 위한 방법론적 모색>, <동물 자료를 통한 유적 성격의 연구: 동삼동 패총의 예>, <경산 임당 유적 고총군 피장자 집단의 성격 연구: 출토 인골의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