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재 · 학술
영국 사우샘프턴 대학 고고학과 교수인 클라이브 갬블Clive Gamble의 Origins and Revolutions: Human Identity in Earliest Prehistory(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 2007)를 번역한 책이다. 원제가 시사하듯, 이른 선사시대의 인류와 그들이 남긴 물질 자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인류의 정체성(휴머니티)이 형성되는 배경과 과정을 고찰한다.
고고학은 인류의 기원과 혁명적 변화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인류의 기원, 농경의 기원, 문명의 기원 같은 항목은 대학의 고고학 교양과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어들이다. 이처럼 우리는 흔히 고고학을 기원을 탐구하고 선사시대와 먼 역사시대의 발전 단계를 설정해 과거 문화의 흐름을 파악하는 학문으로, 다시 말해서 어떤 현재적인 것의 기원을 추적하고 그것의 형성 과정의 단계를 파악하는 학문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갬블은 이러한 접근을 비판한다. 그 어떤 것의 시작을 논하기 위해서는 기원점을 설정해야 하는데, 사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인류의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식물자원을 채집하면서 방문할 때를 위해 씨앗을 흩뿌려 놓았다면, 이것은 농경인가? 인간의 그와 같은 의도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갬블은 이 같은 질문에 문제를 제기하고 기원을 탐하는 학문으로서 고고학을 비판한다.
인류사의 고찰에서 혁명적 발전이란 개념은 타당한가?
변화에 대한 관점은 크게 점진적인 과정을 강조하는 방식과 단절적인 변화를 강조하는 방식이 있다. 찰스 다윈이 자연선택을 말했을 때는 점진적인 진화를 염두에 두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와서 변화는 기나긴 시간에서 일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며 긴 시간은 정체된 상태로 존속된다는 관점이 유행했다. 이와 더불어 고고학에서는 ‘혁명’이라는 개념을 원용하여 인류의 문화 진화에서 보이는 큰 사건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돌이켜보았을 때 인류사에 그만큼 큰 전환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내린 것이다.
갬블은 기원 연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혁명적 변화, 단절적인 변화를 강조하는 것은 과거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신석기혁명, 그리고 최근 많은 연구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인류혁명이란 관점은 과연 변화를 해석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가? 과연 인류혁명이란 개념이 인류의 현재 모습을 이해하는 데 타당한 수단일까? 변화는 단속적인 과정, 곧 마치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분절적인 과정으로 일어났을까? 아니면 휠체어를 위한 길처럼 경사를 이루며 천천히 올라가는 오르막 같은 궤적이었을까? 특히 혁명이라 불리는 변화가 일어나기 이전의 인류는 무엇이란 말인가? 에렉투스나 네안데르탈과 같은 호모 종들은 진화적인 과정으로 사라져버려야 할 운명이었던 것일까? 이들은 인류라는 이름 안에 포괄할 수 없는 존재들인가?
기원점을 설정하고 변화를 혁명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방법이 문제가 많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클라이브 갬블이 제안하는 새로운 시각은 언뜻 너무 급진적으로 보인다. 갬블은 기술의 사회성, 곧 ‘사회적 기술social technology’을 강조한다. 사회관계를 반영하는 기술은 물질 자료를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시각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사람과 사물 사이의 관계가 중시되는데, 사람이 사물 또는 인공물이나 유물을 만들고, 유물은 다시 사람의 몸을 통해 표현되고 표상되며, 결국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 있는 존재물이 된다. 그런 관계는 신석기혁명이나 인류혁명이 말하는 시기를 훨씬 넘어서는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관계론적 시각은 사람과 사물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 곧 휴머니티를 탐구하는 데 귀중한 통찰을 제시한다.
현재의 주도적인 고고학적 설명방식에 따르면 인류 정체성(휴머니티)의 현재를 만들어낸 근본적인 전환으로 강조되는 것은 마을을 이루고 정주하면서 시작된 사회질서의 확립과 사회관계의 공식화, 노동력과 무력의 조직, 계급의 발생과 고착화, 집단 규모의 확대, 문명 또는 국가의 기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벗어나 본질이 아니라 변이를 강조하고 변화를 점진적이고 꾸준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고고 자료에서 드러나는 수없이 많은 다양성을 더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고고학에서 중요한 관점은 변이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이지 변화의 궤적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의 궤적이란 우리의 머릿속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변화가 일어났음을 부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증거로 보았을 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빨라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변화를 단계로 파악하는, 곧 혁명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변화를 단계로 파악하는 것은 기술의 효율성이나 자연에 대한 통제력의 증가 같은 기준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긴 선사시대에 인간 정체성의 형성 과정을 파악할 때 그 같은 단계는 장애물일 뿐이다. 갬블은 오히려 경사진 언덕을 오르막으로 올라가는 정도의 변화를 설정한다. 인간 정체성의 규모, 곧 척도상 변화를 중시한다.
클라이브 갬블에 따르면, 기원과 혁명이라는 고고학에서 흔하게 쓰이는 개념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것의 시작이나 기원, 급격한 변화 시점을 찾기보다는 결국 새로운 조건을 낳은 변화의 과정을 강조한다. 변화란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내재하는 고유한 성격의 것이 아니라 고고학적인 질문의 과정이다. 신석기혁명이나 인류혁명을 우리가 바라는 틀대로 변화가 일어나도록 이해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주입의 결과물이다. 즉, 기원점을 설정하고 혁명이란 개념으로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가진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인류,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자연환경과 사물들로 이루어진 건축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세상을 느끼고 경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되어온 것이다.
갬블은 인류의 문화 진화 또는 기술 변화를 세 흐름(곧, 시기)으로 구분하여 이해한다. 10만 년 전까지의 기술의 ‘긴 도입부’ 시기에는 주로 석기를 사용해 사물을 조각내는 과정이 주도했으며, 무덤(용기)을 사용해 죽은 자의 몸이 흩어지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10만 년 전에서 2만 년 전까지의 기술의 ‘공통 토대’ 시기에는 사람 몸을 담는 막집(용기)들이 경관 위에 배치된다. 물론 한 해 내내 같은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 건축물 공간은 이때부터 인류에게 낯익은 사물이 되었다(신석기시대에야 이런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과장이다). 기술의 ‘공통 토대’ 시기 내내 식량자원의 다양성이 꾸준히 증가하면서 식량자원의 다양화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인류 정체성의 중요한 성격이라고 할 변화는 이미 후기 구석기시대 수렵채집민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기술의 ‘짧은 대답’ 시기인 후기 신석기시대에는 공간 배치와 네트워크의 규모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정주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동물을 사육하고 곡물을 재배하는 과정을 사람이 창의적으로 이끌었다기보다는 사람이 그 과정 속에 들어갔다. 정주 마을이라는 건축된 환경 속에 의도하지 않게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인류,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자연환경과 사물들로 이루어진 건축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세상을 느끼고 경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되어온 것이다. 그 과정은 지난 몇 백 년, 몇 천 년의 일이 아니라 진화라고 부를 만큼 오랜 수십만, 아니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의 내력이 이루어온 결과이다. 즉, 인류의 정체성(휴머니티)은 물질문화와 혼연일치되어 300만 년의 세월 속에서 발달해온 것이다.
저 : 클라이브 갬블(Clive Gamble)
사우샘프턴 대학교 고고학과 교수다. 유럽 선사시대, 특히 구석기고고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로서 왕성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 영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2005년 이 분야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왕립인류학회로부터 리버스 기념 메달을 받았다. 『기원과 혁명 : 휴머니티 형성의 고고학』의 저자.
역 : 성춘택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고고학을 전공했으며, 미국 워싱턴 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 인류학과에서 고고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2001). 충남대학교 고고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로 구석기시대를 비롯한 선사시대, 수렵채집민 고고학, 고고학 이론과 방법론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기원과 혁명』(클라이브 갬블, 2013), 『고고학사』(브루스 트리거, 2010), 『다윈 진화고고학』(오브라이언·라이맨, 2009), 『인류학과 고고학』(크리스 고스든, 2001)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