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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일곱 원로에게 듣는 한국 고고학 60년

저자
한국고고학회  편
  • 가격

    18,000 원

  • 출간일

    2008년 10월 17일

  • 쪽수

    456

  • 판형

  • ISBN

    9788956029382

  • 구매처 링크

한국 고고학 60년사의 정립


이 책은 2006년 창립 60주년을 맞은 한국고고학회가 기획한 '한국 고고학사 정립을 위한 원로증언집'사업의 결과물이다. 해방 이전까지 일본인에 의해 주도되었던 한국의 고고학은 해방 직후인 1946년 경주 호우총 발굴조사로부터 온전히 우리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한국 고고학이 이미 60돌을 넘겼다. 그간의 발견과 성과들이 모두 발굴보고서나 논저 등의 공식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고고학 활동을 둘러싼 경험 대부분이 전승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고고학회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한국 고고학사를 온전히 정립하는 일환으로 생존해 계신 학계 원로 선생님들로부터 초창기의 활동과 직접 경험을 증언받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였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초창기는 물론 한국 고고학 60년의 상당 부분이 그 엄청난 변화로 인해 이미 역사적 위치로 넘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고고학을 이끌었던 원로 가운데 이미 여러분이 작고하셨습니다. 이제 한국 고고학의 역사에 대한 기록의 축적이, 특히 발굴보고서나 논저로 남는 공식기록 외에 고고학적 활동을 둘러싼 저간의 사정이나 맥락을 기록으로 남겨놓는 일이 시급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목적의식에서 학회는 생존해 계신 원로 선생님들로부터 초창기의 활동과 당신들의 직접 경험을 증언받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책이 그 결실입니다. 과거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동시에 미래를 여는 빛이기도 합니다. 우리 고고학계가 선배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고, 모두의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제20회 한국고고학회장 최병현 -출간 의의를 묻는 인터뷰 중에서)


한국 고고학의 초석을 다진 일곱 명의 고고학자들


학회는 총 일곱 분의 원로를 선정하고 대담을 진행했다. 원로의 선정은 한국 고고학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분들을 우선으로 했지만, 한국 고고학의 연구 분야를 망라할 수 있도록 감안하였다. 이렇게 선정된 일곱 원로는 남한 구석기 연구의 문을 연 손보기 선생, 국립박물관에서모범적인 발굴을 수행해 주신 윤무병 선생, 감은사지를 시작으로 천마총, 황남대총 등 우리나라 국가발굴을 이끌어 온 발굴왕 김정기 선생,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방고고학의 새 지평을 연 윤용진 선생, 조용하지만 정열적으로 삼국시대 유물연구에 전념하신 윤세영 선생, 남북교류가 없던 시절 북한 고고학의 성과를 소개하며 남북 고고학을 잇고자 한 정한덕 선생, 경주개발계획과 발굴제도 수립을 주도해 오신 정재훈 선생이다. 한국 고고학의 중심과 변방, 연구와 제도 등 고고학사 전반에 대해 그 길을 몸소 걸어오신 원로 선생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되짚어보고 있다.


손보기 선생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는 공주 석장리유적 발굴이다. 1963년 답사를 통해 석장리 구석기의 존재를 확신한 선생은 이를 믿지 않는 당시 학계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설득에 나서 석장리 발굴에 나선다. 이후 1992년까지 12차례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졌고, 한반도 구석기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인정받아 2006년 9월 석장리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손보기 선생은 개관과 함께 명예관장에 추대되었다. 


윤무병 선생은 국립중앙박물관 설립 초기부터 실무를 맡아 진행해왔다. 1954년부터 1972년까지 국립박물관에 재직하며 감은사지와 무령왕릉 발굴 등의 굵직한 발굴을 맡아 진행했다. 이후 사직하고 충남대 교수로 재직하며 정림사지를 비롯한 백제 유적에 대한 발굴을 진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 청동기유물, 특히 동검류 연구의 선구자로 인정받는다. 1991년 학술원 회원에 추대되었다.


김정기 선생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발발한 6.25사변으로 인해 도일하여 건축학을 전공하였다. 수학 후에는 일본 시텐노지(사천왕사四天王寺) 등의 발굴에서 뛰어난 실무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귀국하여 남대문 중수, 천마총 발굴, 황남대총 발굴, 불국사 발굴 등을 지휘했다. 한국 고고학에 실측 개념을 처음 도입한 장본인이다. 


윤용진 선생은 애초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해서 사회학과를 졸업한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졸업 후 가업을 잇기 위해 고향인 대구에 머물던 차에 우연한 계기로 고고학과 연을 맺는다. 이후 경북대에 몸담고 있으면서 대구의 초기국가 형성, 신라고고학 등의 지역고고학에 초석을 놓았다. 퇴직한 지금도 재임 중 미처 다하지 못한 각종 발굴기록을 정리하고 계신다.


정한덕 선생은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 호세이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도립대 ‘조선사연구회’를 통해 한국 고고학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후 메이지대학에서 수학하였고, 도쿄지역 한국고고학 연구의 산실인 ‘동북아시아고고학연구회’를 통해 한국 고고학 연구를 계속했다. 북한과 남한의 고고학 자료를 번역하여 소개하며 남북 학계 교류의 물꼬를 텄다. 1985년에 처음 남한을 방문했으며 부산대학교 교수로도 재직한 바 있다. 


윤세영 선생은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박물관에 근무하면서 고고학에 입문했다. 우리나라 대학박물관 최초의 발굴조사를 맡아 진행했다.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지만 열정을 가지고 연구를 지속해왔다. 현재 중앙문화재연구원 원장 겸 이사장이다. 


정재훈 선생은 문화재관리국 사무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국가 고고학발굴제도 수립에 힘써 오셨다. 경주관광개발사업과 천마총, 황남대총, 안압지 등의 발굴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구제발굴 제도화 또한 선생의 노력이 깃들어 있다.


원로 고고학자의 비망록


이 책은 선생들이 그간 어디에서도 쉽게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발굴보고서나 논저에는 담을 수 없었던 것들이다. 고고학과 인생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은 인생의 지혜를 담고 있고, 후학들과 학계에 대한 당부를 통해 한국 고고학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전모가 알려지지 않은 여러 사건들에 대해 궁금증을 풀어주며 재미를 더하고 있다.


▶호우를 찾아갔는데 아리미쓰가 이것을 들어 올려 보여주면서 바닥의 명문 쪽을 보는 광경을 보았지요. 아리미쓰는 “아, 손이 떨립니다”하는데 그때 떨리는 손에서 그 놋그릇의 가운데 금이 나타난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일생 처음으로”라고 하면서 말을 잇지 못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땅속의 미세 기후 환경, 온습도 속에 있던 것을 햇볕이 쪼이는 가운데 들어 올린 것이 화근으로 보였지요.(손보기, p. 27)


▶다음해 7월 우연한 계기에 착수된 무령왕릉 발굴은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한 대사건이었습니다. 이 발굴을 주관한 김원용 교수는 그 후 일생을 두고 후회하게 되었으며, 분명히 잘못을 저지른 발굴이었습니다. 이 발굴에 대해서는 초창기의 우리나라 고고학의 개척에 종사한 학자로서 모두가 함께 겸허하게 반성하고 마음에 굳게 다짐해야 할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윤무병, p. 103)


▶그런데 하루는 숙소로 가는데, 98호 고분, 즉 황남대총을 지나가면서 그 사람이 그래요. 옛날에, 얼마 전인가 이병도 박사가 저 고분을 보면서“저 고분을 발굴하고 안을 복원해서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대요.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제가 “저 산 같은 무덤을 미쳤다고 발굴해!”하고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결국에는 제가 그 발굴을 한 미친놈이 된건데, 사실은 98호분을 발굴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였어요. 왜냐하면 같은 유적 중에 유일한 발굴이라든지, 혹은 제일 오래 되었다든지, 발굴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하거든요. 이러한 이유가 없으면 함부로 손을 안 대는 게 좋아요.(김정기, p. 187)


▶그랬는데 일이 엉뚱하게 풀린 거라요. 모두들 저놈이 자리 안 준다고 삐졌다고, 일이 그렇게 되었어요. 저는 전혀 생각도 안 했는데. 그만둔다고 하고 보름인가 지났는데, 그때 교무처장이던 조병하(물리학), 문리대학장이던 노명식, 박을룡 이런 사람들이 와서는 그날 술을 사래요. ‘언제는 제가 안 샀습니까?’하고는 술을 마시러 갔지. 거기서 딱 내민 게 전임강사 발령장이라요. 그렇게 해서 전임강사가 되었는데, 그때는 참 ?감했지요.(윤용진, p. 249)


▶동북아시아고고학연구회에 대해서는 오늘 저녁에 상세히 듣기로 하고 이 연구회에서 일어난 커다란 사건의 하나는 강상^루상 보고서인데 이것을 얻게 된 것은 79년도 북한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 그후 일본에 돌아와 연구회 회원들이 이 책을 교재로 윤독회를 가지고, 후에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 번역을 해서 나온 책이 『강상·루상』입니다.(정한덕, p. 344)


▶이렇게 정리한 유물들이 4만여 점에 달하였는데 이것을 거의 혼자서 다한 셈입니다. 출근하여 퇴근할 때까지 이런 작업에 매달리다 보니 흙투성이의 작업복을 입은 막노동꾼이 다름없었지요. 이런 모습을 돌아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나 하고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되풀이하다가 오기 비슷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군요. 말하자면 싫다고 하여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적극적으로 싫은 일을 좋아하려고 긍적적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확 바꾸고 보니 몸은 피곤하였지만 차츰 작업이 친숙해지고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고고학에 입문하게 된 셈이지요.(윤세영, p. 378)


▶지금도 안압지 발굴에 대해 나는 미안한 점이 많아요. 안압지 발굴은 잘 된 게 아니거든요. 그때는 수십 대의 양수기를 사가지고 그 물을 퍼내도 비가 오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거야(웃음). 지금 발굴하는 것처럼 지붕을 씌웠어야 했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집이 장충체육관이었어요. 그곳에 가보니 기둥을 안 세우고 지붕을 매달았더라고. 건축가 김중업 씨한테 기둥 없이 지붕을 어떻게 얹느냐고 자문도 구했지요.(정재훈, p. 429)



 

편 : 한국고고학회

<한국 농경문화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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