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 검색

HOME>도서>대학교재 · 학술

대학교재 · 학술

본문

공재 윤두서 일가의 회화

저자
차미애  저
  • 가격

    45,000 원

  • 출간일

    2014년 12월 08일

  • 쪽수

    842

  • 판형

  • ISBN

    9791185617206

  • 구매처 링크

이 책은 윤두서의 회화를 개별적으로 파악한 선행 연구들과 논점을 달리하여 거시적인 관점에서 해남윤문 삼대가를 계통적(系統的)으로 고찰함으로써 윤두서의 회화 및 윤두서 일가 회화에 대한 특성을 동시에 규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저자는 3대에 걸친 문인화가를 배태시킨 토양인 해남윤문의 앞 세대 선조들의 정치적·경제적·예술적 기반과 이후 학맥, 당색, 혼맥으로 이어진 윤두서와 윤덕희 부자, 이서, 이만부를 중심으로 구축된 ‘근기남인 서화가 그룹’의 형성과정을 검토한다. 윤두서, 윤덕희, 윤용 3대에 걸친 문인화가들의 예술가로서의 삶의 족적, 교유했던 인물들, 예술을 펼쳤던 생활공간, 그들이 선호했던 지적 관심사 등을 문헌기록, 기년작 등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 가문이 처한 시대상황과 접목시켜 연대기적으로 복원하며, 윤두서 일가의 회화가 화단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점검한다.


조선 후기 화단의 선구자 윤두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는 중국출판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능동적으로 남종산수화, 풍속화, 진경산수화, 서양화법 등 새로운 화풍을 구사하여 세상이 우러러볼 만한 경지에 이른, 조선 후기 화단을 대표하는 ‘거장’이다. 조선 후기에 활동했던 문인들은 윤두서를 ‘당대 화단의 선구자’로 평하였다. 윤두서 일가는 당색을 초월하여 열린 교유를 가짐으로써 그의 회화 애호층을 넓혔고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 결과 18세기 초 화단의 제1인자의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심재(沈??, 1722-1784) 

“우리나라 중엽 이상에서 명수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그림은 졸렬하고 메마르고 거칠고 엉성했는데, 비로소 윤공재로부터 처음으로 길이 열렸다” 

서인계 서화비평가 조귀명(趙龜命, 1693-1737)

“글씨와 그림은 윤두서로부터 비로소 정밀하고 심오하게 탐구하여 아도(雅道)를 좇았다. 그러한 연후에 문기(文氣)가 날로 높아져 가히 중국인과 더불어 서로 선후를 다투게 되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우리나라에서 옛 그림을 배우려면 곧 공재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윤두서, 윤덕희, 윤용 ― 해남윤씨 삼대문인화가의 탄생


윤두서의 예술적 재능은 이후 아들인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 1685-1766)와 손자인 청고(靑皐) 윤용(尹?, 1708-1740)으로 전승되어 해남윤씨는 3대에 걸쳐 문인화가의 일문(一門)을 형성하게 되었다. 

문화의 절정기인 숙종?경종?영조년간에 걸치는 약 100년간 세가를 형성했던 해남윤문 삼대문인화가들은 새로운 문화적 변화를 체감하고, 능동적으로 남종산수화, 풍속화, 진경산수화, 서양화법 등 새로운 화풍을 구사함으로써 18세기 전반기 화단에서 큰 위상을 차지했다. 따라서 윤두서 일가의 회화는 조선 후기 회화를 이해하는 프레임이다.

윤두서 48세라는 짧은 생애 동안 말 그림과 인물화로 명성을 떨쳤으며, 남종산수화, 풍속화, 지도와 진경산수화, 사생화, 자화상, 서양식 음영법, 소설 삽화의 수용 등 조선 후기의 새로운 회화 경향을 선구적으로 시도하여 당시의 화단에 괄목할만한 족적을 남겼다. 또한 중국출판물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독자적인 회화이론을 펼친 화론가였으며, 탁월한 감식안을 지녔던 서화비평가였다. 서예 분야에서도 17세기 한호(1543-1605)의 석봉체에서 탈피하여 옥동 이서(李?, 1662-1723)와 함께 왕희지체를 근간으로 조선 후기 새로운 서체를 시도하였다.

윤두서의 아들 윤덕희는 대략 24세를 전후한 시기에 서화에 입문하여 82세까지 비교적 긴 생애 동안 부친의 화업을 계승하였다. 남종산수화, 풍속화, 진경산수화, 서양식 음영법, 소설 삽화 등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다양하게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말 그림과 신선 그림으로 당대 화명을 떨쳤던 문인화가였다. 

윤덕희의 둘째아들인 윤용은 문장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으며, 24세(1731) 때부터 33세(1740)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약 10년 동안 한양에서 예술 활동을 하면서 화가로 알려졌다. 조부와 부친을 이어 화가로서 대성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으나 마음껏 기량을 펼치지 못하고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부와 부친의 화업을 이어받아 산수화, 풍속화, 도석인물화, 초충?화훼 등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옛 대가의 법을 탐구하여 새로운 법을 찾다


윤두서의 예술정신은 특징은 고인(古人)의 법을 배워 스스로 변통할 줄 아는 ‘학고지변(學古知變)’과 ‘진(眞)’과 ‘금(今)’의 추구이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 김윤겸은 옛 그림을 배우는 것[學古畵]은 공재부터 시작되었고, 오직 공재만이 옛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변통을 아는[知變] 유일한 화가임을 지적하였다.


그림은 한 대의 종이 되었다. 옛날 우리나라의 그림에는 묵만 있을 뿐 필이 없었으니 화격(畵格)이 거칠고 속되어서 수백 년을 흘러오는 동안 서로 답습했다. 안견, 김시, 이징, 김명국 등이 나라의 명수로 불렸으나 고루한 투가 한결같았다. 윤두서가 나와 능히 점점 스스로 (그림의) 변통을 알았다. 인물과 산수 그림은 정순(精純)하고 법도가 있다. (중략) 우리나라 사람의 옛 그림 배움은 효언에게서 시작하니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일이 처음으로 출현하였다고 할 만하다.(효언은 윤두서의 자(字))


윤두서에게서 뚜렷하게 감지되는 예술정신은 ‘사실성[眞]’과 ‘현실성[今]의 추구이다. 이 예술정신은 조선 후기에 풍미했던 풍속화와 기물도, 지도와 진경산수화, 서양식 음영법 등과 같은 새로운 시대 회화 장르와 화법을 개척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윤두서는 ‘현재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과 ‘조선인’이라는 자각의식을 화폭에 담았다. 지금 존재하는 나, 내가 사는 집, 내 주변의 인물과 사물, 조선의 국토를 대상으로 직접 관찰하고 참모습을 그려내는 ‘진’과 ‘금’을 동시에 추구한 예술정신이 구현된 초상화, 자화상, 풍속화, 기물도, 진경산수화, 지도, 사생화 등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새로운 시대 예술이라는 점에서 그가 남긴 가장 괄목할만한 예술적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가 넓고 깊어 당시 새로운 흐름인 국제화시대에 발맞추어 중국 회화의 진적과 다양한 중국출판물 등 새로운 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혁신적인 화가이자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이전 시기의 화가들과 크게 변별성을 지닌다.


서거 300주년을 맞아 다시 조명되는 공재


2015년은 공재 윤두서 서거 3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국립광주박물관에서는 공재 윤두서 서거 300주년 기념 특별전(2014. 10. 21~2015. 1. 18)과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방송에서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등 다양한 곳에서 공재의 예술을 조명하고 있다.

저자인 차미애 박사는 석?박사학위논문을 비롯해 지난 15년여 동안 공재 윤두서 관련 연구를 지속해왔으며, 이 책은 그 오랜 노력의 결실이다. 저자는 윤두서의 회화를 개별적으로 파악한 선행 연구들과 논점을 달리하여 거시적인 관점에서 해남윤문 삼대가를 계통적(系統的)으로 고찰함으로써 윤두서의 회화 및 윤두서 일가 회화에 대한 특성을 동시에 규명하였다. 옛것에 대한 탐구와 동시대에 대한 관심, 새로운 장르 개척의 선구자적 태도를 보여준 윤두서 일가의 서화세계를 다룬 이 책은 조선시대 회화사의 한 부분을 집중 조명하는 학문적 성과이다.



 

저 : 차미애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문학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문학석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문학박사)

홍익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중앙대학교, 경희대학교, 상명대학교, 덕성여자대학교, 용인대학교 등에서 한국미술사, 한국회화사, 동양미술사 강의

현(現)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홍보교육팀장

책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