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재 · 학술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국가적 지원 아래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 군주 초상화. 각각의 군주 초상화는 미술작품으로서 명작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과 문화, 역사를 읽어내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한국의 임금, 중국의 황제, 일본의 천황을 그린 초상화를 통해 각국의 미술과 역사를 동시에 읽어내는 책.
역사와 시대를 읽으며 감상하는 군주 초상화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황제가 되고 나서 자신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를 전국에 배포한다. 그런데 그 초상화라는 것이 커다란 턱에 튀어나온 광대, 굵직한 코에 이마도 지나치게 돌출했으며, 피부는 여기 저기 얽은 흔적이 있는 곰보의 상이었다. 어떻게든 잘 생기고 위엄 있게 그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못 생긴 정도를 넘어 흉측한 모습으로 황제의 얼굴을 그린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중국은 유명한 다섯 산과 방위를 묶어 중악, 동악, 서악, 남악, 북악이라 불렀는데, 사람의 얼굴에 있는 코, 오른쪽과 왼쪽 광대, 이마와 턱 다섯 부분도 오악이라 불렀다. 그리고 사람의 얼굴에서도 이 오악이 산처럼 높고 클수록 대길하다고 보았다. 주원장은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하다. 얼굴에서 오악 부분을 최대한 크게 그린 초상화를 배포해, 백성들에게 자신이 황제가 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선전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먹고 살 방법이 막막해 생계형 탁발승 노릇까지 한, 콤플렉스가 많았던 가난한 농민 집안 출신 황제는 백성들에게 자신이 황제감이라는 점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고, 비록 못생긴 얼굴이지만 가장 좋은 관상을 지닌 얼굴로 자신을 묘사해도 좋다고 결정했을 것이다.
<왕의 얼굴>은 한국.중국.일본의 군주 초상화를 삼국의 역사 속에서 바라본다. 모든 미술작품은 시대,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지만 군주 초상화는 특히 더 그렇다. 왕의 얼굴을 그리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동원되었고, 역시 국가적 지원과 관심 아래 초상이 제작되었다. 조선시대 왕의 초상인 어진(御眞)의 제작 과정을 살펴보면 군주 초상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많은 공이 들어가는 일이었나 짐작해볼 수 있다.
훈련도감 급의 사업, 어진 제작
어진을 그리기 위해서는 제작 전반을 담당할 도감(都監)이라는 임시 기구가 설치된다. 임진왜란 때 임시로 설치되었다가 이후 거의 상설화된 훈련도감도 이런 도감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 후기 국방력의 큰 부분을 담당했고, 4,500여 명의 정규군으로 조직되었던 훈련도감의 상급 관원으로는 도제조(都提調)가 1명에 제조(提調)가 5명이었다. 도제도는 전.현직 정1품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가운데 임명되는 명예자문직이고, 제조는 종1, 2품/정2품 관리가 겸직으로 임명되어 관청 업무를 지휘.감독하는 직책이었다. 그런데 어진을 제작하는 어진도사(모사)도감에는 도제조 1인에 제조 3명이 포진되었다. 훈련도감의 위상과 비교해보아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이렇게 구성된 도감에서는 추천 혹은 시험을 통해 화사를 선발하였는데, 어진에서 담당하는 부분에 따라 화원이 별도로 선발되었다. 초상에서 얼굴 부분을 담당하는 주관화사, 임금 몸체에서 중요하지 않는 부분을 담당하는 동참화사, 채색할 때 일을 돕는 수종화사의 위계로 구성된 어진화사는 6명에서 많을 때는 13명까지 구성되었다. 물론 이들을 돕는 장인과 노비들까지가 포함된 팀이 작업을 진행했다. 정조 15년 구성되었던 어진화사 명단을 보면 주관화사 이명기, 동참화사 김홍도, 수종화사 허감.한종일.김득신.신한평.이종현으로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모두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우리에게 왕의 초상 제작은 중요한 국책사업이었고, 이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최고의 화가와 최고의 자원이 투자되어 초상이 제작될 때는 그에 상응하는 정책 목표가 설정되기 마련이었고, 이것은 반대로 군주의 초상화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모든 것을 담는 그릇, 중국의 황제상
하지만 한.중.일 삼국에서 군주의 초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씩 달랐다. 우선 중국에서 황제의 초상은 앞서 명 태조 주원장 초상에서 보았듯이 중요한 ‘선전 수단’이었다. 넓은 영토에 있는, 다양한 문화의 다양한 민족들을 통치하고, 주변국들과 안정적인 사대관계를 맺어야 했던 중국의 황제에게 초상은 훌륭한 정책 홍보 수단이었다. 특히 한족이 아닌 이민족 통치자였던 청의 경우에는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건륭제 대열도」는 강건성세(康乾盛世)의 최전성기를 이끈 청의 건륭제를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 낭세녕(주세페 카스틸리오네)이 그린 작품이다. 말 위에 올라탄 황제는 활과 화살로 무장을 하고 있다. 전통적인 만주 팔기군의 복색을 하고 있는 황제는, 청은 말타기와 활쏘기로 단련된 만주족의 강력한 무력에 기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성기 청 제국을 가능하게 한 만주 팔기군으로 대변되는 군사력의 강조 역시 보여준다. 하지만 무력으로만 거대한 제국을 통치할 수는 없는 법. 더구나 중국은 오랜 기간 칼이 아닌 붓으로, 즉 유학이라는 정치이념에 근거해 통치되던 전통이 있었다. 그래서 건륭제의 할아버지인 강희제는 「독서상」에서 유학을 숭상하는 교양 있는 군주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황제의 업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때로는 전국, 특히 청에 반발이 심했던 강남 지역을 순시하며 민심을 돌보고, 대규모 행차를 통해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남순’을 한다. 매년 군사훈련의 성격이 강한 대규모 사냥을 주관하고, 황위 승계의 정통성도 홍보해야 했고, 한족과의 동질성을 보여주는 유화적인 모습도 보여야 했다. 심지어 중국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에 대한 통치 또한 황제의 몫이었기에 서양식 가발을 쓰고 양장을 한 모습으로, 즉 분장을 한 모습으로 초상화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필요에 따라 황제의 초상에 반영되었고, 그렇게 그려진 초상은 역시 각각의 용도에 따라 활용되었다.
애도, 추모, 기념. 일본의 천황상
한편 일본에서는 다른 측면으로 천황의 초상이 전개된다. 일본에서 천황은 쇼군(장군)이 중심인 막부와 대립을 지속한다. 하지만 군사력을 근거로 하는 막부와의 대결에서 천황권이 기세를 펼치기는 쉽지 않았기에 개인적으로도, 위정자로서도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삶을 산 천황이 많았다. 더구나 이런 저런 제약이 있어 운신의 폭이 좁았던 천황의 자리를 일찌감치 물려주고 복잡한 의례로부터 자유로운 상황이 되거나 불가로 귀의해 법황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복잡한 정쟁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불운했던 군주를 그리는 일본의 초상에는, 그래서 애도와 추모의 느낌이 강하게 담겨 있다. 그런 이유로 초상을 그린 화가도 천황과 인간적 애착이 있는 자녀들 혹은 친족들이었던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었고, 표정 역시 그리 화사하지 못한 그림이 많다. 천황으로서의 화려함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려는 의도가 강했던 것이다.
왕권의 정통성을 대변하는 강력한 상징물, 어진
한국의 경우 군주 초상화는 중국, 일본과는 또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 앞서 소개했던 조선시대 어진 제작에서 보듯이 군주 초상 제작은 한국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업이었다. 하지만 중국, 일본과는 또 다른 특징이 발견되는데 바로 극단적인 사실감이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어진의 특징으로 ‘털끝 하나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以 便是他人)’라는 정확성에 대한 집요한 추구가 있다. 피부의 주름 하나, 반점 하나 놓치지 않는 정확한 묘사가 어진에서도 구현되었던 것이다. 묘사하려는 대상과의 차이를 최대한 줄이려는 이런 노력의 이면에는 그림과 사람이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즉 왕의 초상은 왕 그 자체였으며, 왕권과 정통성을 상징하는 강력한 조형물이었다. 왕자의 난을 거치며 용상에 앉은 태종은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태조 어진 봉안과 진전 건립에 적극적이었고, 왜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광해군, 열강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고종 등도 모두 어진 제작과 봉안, 진전 건립에 열성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의 어진은 조금이라도 훼손되면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다. 1631년 인조 9년 경주에 있는 어진 봉안처인 집경전(集慶殿)에 화재가 발생해 어진들을 불에 타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예조에서는 왕의 직접 소복을 입고 사흘 동안 곡을 해야 한다고 계를 올린다. 왕의 무덤인 능에 화재가 발생해도 왕은 소복을 입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어진의 위계는 대단한 것이었다.
미술과 역사를 함께 읽는 즐거움
2010년 가을 화정박물관에서 ‘동아시아 삼국 군주 초상화’라는 주제로 열린 대중강연의 내용을 강연했던 저자가 다시 다듬고 손을 봐서 정리한 이 책에서, 같은 듯 다른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삼국의 군주 초상화는 이렇게 역사적.시대적 배경과 함께 해설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미술사, 특히 동양미술사의 경우 작품 자체에 대한 분석에 머물거나 조금 더 나아가면 작품의 뒷이야기를 다루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직까지 우리 미술사학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 책은 기본적인 작품에 대한 해설과 작품 속 주인공, 그 주인공이 펼치는 역사적 행위들과 그것이 빚어내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한국과 중국, 일본을 넘나들며 함께 자리를 잡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방대할 수 있는 이런 이야기들이 맥락을 잃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바, 저자가 이끄는 대로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동아시아 삼국의 군주 초상화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 생긴다.
저 : 조선미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하고(미학 부전공),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철학 석사학위(미학 전공)를 받았으며,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에서 문학 박사학위(미술사 전공)를 받았다. 일본 도쿄대학 문학부 Visiting Scholar, 미술사학연구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과 문화재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예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