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재 · 학술
출판사 리뷰
18세기 조선에서 선비그림, 유화(儒畵)가 발전하는 과정을 조명한 책이다. 저자는 당시의 대표 화가 3인―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표암 강세황의 삶과 작품을 분석하면서 지식인 계층인 유학자 선비에 의해 만들어진 회화 세계를 탐구하고, 중국의 문인화와 차별화되는 한국적 유화의 특징을 밝혀낸다. 유화는 당시 선비들이 예술과 회화의 변혁을 통해 사회와 국가의 변화와 발전에 기여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산물이라는 것이다.
윤두서, 전통적인 회화관에 도전하다
조선시대에 회화는 유학적 본말론(本末論)의 영향 탓에 천한 기예(技藝)로 여겨졌다. 선비들은 회화를 즐기거나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완물상지(玩物喪志), 즉 물상(物象)을 좋아하여 뜻을 해친다고 하여 꺼려했다. 중국의 문인화, 남종화가 유입되어 일부 재능 있는 지식인 계층에 의해 그려지고 향유되었지만, 일반적으로 그림은 취미를 위한 여기(餘技)로 받아들여졌다.
18세기에 이르러 화단에 새로운 경향과 화풍이 일어나는데, 그 주역이 바로 선비화가인 윤두서, 정선, 강세황이다. 이들은 교조적인 성리학과 전통적인 회화관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을 회화 분야에서 실천하는 진취적인 인물들이었다. 저자는 이들의 활발한 회화 작업과 화론을 통해 조선의 선비그림이 중국의 문인화와 차별화되는 독자적인 경지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윤두서(1668-1715)는 당쟁의 와중에 과거를 접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회화는 그에게 유학자로서의 자기수양을 위한 도구이자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그는 17세기까지의 선비화가들과 달리 완물상지론에 도전하고 기예를 중시하는 실학적인 사상을 제시하면서 회화를 사상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실현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그는 중국에서 들여온 새로운 정보와 각종 화보 등을 활용해 회화의 방법론을 모색했으며, 회화를 화학(畵學)과 화도(畵道)의 차원으로 격상시키는 등 직업화가뿐만 아니라 이전의 선비화가들과도 뚜렷이 구분되는 선비화가의 새로운 정체성을 제시했다. 하지만 여기화가로서의 면모는 버리지 않았다.
이처럼 윤두서는 사상과 이념을 담은 회화라는 관념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기법과 구성, 표현의 변화를 통해서 그런 이념을 회화적으로 구현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나아가 작품의 수장과 감평, 화론 등으로 회화예술의 영역을 넓혀 가면서 그림의 학문인 화학(畵學)을 구축했고 선비그림의 궁극적 경지인 학예일치를 구현하려 했다고 저자는 평한다.
전문화가 정선의 등장
정선(1676-1759)은 지체가 낮은 집안 출신으로 타고난 그림 솜씨 때문에 벼슬길에 올라 평생 하급관료로 봉직하면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통해 권력가와 저명인들과 교류했다. 그는 실경산수화를 넘어 진경산수화의 정형을 수립한 인물로 널리 알려졌으나 사의산수화, 남종화풍, 고사인물도 등 여러 분야를 개척한 화가이기도 하다. 나아가 원근법과 투시도법 같은 서양화법을 적극 수용하여 전통 기법과 잘 융합한 독특한 화풍을 구축한 뛰어난 화가였다.
그는 당시 선비와 관료로서는 드물게 화업(畵業)에 몰두한 전문화가로서 직업화가 못지않게 수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주문 제작뿐만 아니라 중개인 역할을 한 친구를 통해 그림 판매에도 나섰다는 최근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 심지어 사신을 통해 중국에도 그림을 판매했다고 한다. 그림을 하나의 업으로 삼은 정선의 이 같은 활약을 통해서 이후 선비화가들이 회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기반이 형성되었다며, 저자는 그를 18세기 화단의 변모와 발전을 촉진한 새로운 유형의 선비화가로 평가한다.
화도(畵道)를 구현한 강세황
강세황(1713-1791)은 과거를 포기하고 살아가던 중년기까지 회화를 자신의 사상과 의식을 담아내는 도구로 활용했고 사회와 주변 인사들과 소통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노년기에 고위 관료가 되어서는 왕의 후원을 받으면서 회화를 통해 정치적, 사회적 업적을 이룩하기도 했다. 그는 깊은 식견과 넓은 시야를 가진 선비로서 독자적인 사상과 미학을 바탕으로 그림을 화학의 차원에서 실천했다.
그가 추구한 사의산수화의 궁극적인 이상은 곧 선비의식을 담은 선비그림, 유화였다. 그는 서화의 수장과 품평, 서예, 인장과 고동 등 회화의 다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중국, 서양, 일본에 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정선에 이어 서양화법을 적극 수용하였다. 사의산수화 분야에서는 시서화(詩書畵) 삼절의 이상을 담아내는 시의도(詩意圖)를 선호하였고, 현실과 일상 정경을 담은 진경산수화를 즐겨 제작하였다. 저자는 윤두서가 개창한 화학이 강세황에 이르러 진정한 의미의 화도(畵道)로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회화의 변혁을 통해 사회의 변화에 기여
이들 세 화가의 등장과 활약에 힘입어 18세기에 많은 선비화가들이 완물상지와 여기라는 관념을 넘어서 회화를 통해 전례 없는 성취를 이루었다. 선비화가들이 이룬 예술적 성취는 여기를 즐기는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개인적 취미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들은 당시 조선이 직면한 새로운 현실과 변화하는 세계를 직시하고 사회의 발전을 주도하는 유학자 선비로서, 예술과 회화의 변혁을 통해 사회와 국가의 변화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동시대의 중국이나 일본의 문인화가들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조선적인 선비화가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조선 후기 선비그림을 가리키는 용어로 선비 ‘유(儒)’ 자를 포함한 유화(儒畵)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조선시대 회화 예술 속에 스며든 지식인 선비의 소명과 역할에 대한 의식과 실천에 주목한다. 바로 그 지점이 조선의 선비그림이 중국의 문인화나 일본의 문인화와 달라진 출발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문인화’로 부르기 시작
조선시대 선비들의 그림은 당시 ‘유화’라고 불렸으며, 이 말은 때로는 선비화가를 지칭하기도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관찬서뿐만 아니라 선비들의 문집들에서도 확인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조선시대의 선비화가와 선비그림을 일반적으로 문인화가와 문인화 또는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로 부르는데, 중국의 지식 계층인 문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회화인 문인화라는 용어를 조선시대의 지식인 계층인 유학자 선비에 의해 만들어진 회화를 가리키는 데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우선 조선시대에 지식인 계층을 가리키는 말로 선비, 유자, 유학자, 사인, 사림 같은 고유한 용어와 개념이 사용되었고, 문인이라는 용어는 문학적인 논의와 관련된 경우에 제한적으로 사용되거나 유학자 선비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문사(文士)를 가리키는 용어로, 문인화라는 말은 조선시대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도시대 중기 이후에 중국의 남종화와 문인화를 수용하기 시작한 일본의 경우에도 근대 이후에는 이러한 회화들을 일본 문인화 또는 남화(南畵)라고 부르면서 그 차이점을 의식적으로 강조했다고 한다.
저자는 문인화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며, 다시 옛말을 되살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조선시대에 유화라는 개념과 용어가 존재하였음을 아는 것은 선비그림의 정체성과 전통 문화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화정미술사 강연 시리즈 세 번째 책
이 책은 화정미술사 강연 시리즈 세 번째 권이다. 1권 『청출어람의 한국미술』과 2권 『왕의 눈물』에 이은 후속작이다. 화정박물관은 매년 한국 및 동양미술사 분야에서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쌓은 연구자를 선정하여 강연회를 개최하고 그 결과를 책으로 간행해, 미술사학이 대중들과 폭넓게 소통하는 장을 마련해 오고 있다.
저 : 박은순
덕성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한국미술사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뉴욕주립대 연구원 및 강사, 일본 세이조대학교 초빙교수,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외국인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위원, 교육과학기술부 인문사회학술연구사업 추진위원회 위원, 문화재청 및 문화재연구소 평가위원, 한국미술사학회 총무이사 및 역사학회 이사, 사단법인 온지학회 회장, 한국고지도연구학회 회장, 덕성여자대학교박물관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위원, 우현학술상 운영위원회 위원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 『금강산도 연구』, 『공재 윤두서』,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 그림』, 『금강산 일만 이천 봉』,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화가 정선』 등과 공저로서 『조선 후반기 미술의 대외교섭』,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한국지도학발달사』, 『표암 강세황』, 『왜관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등이 있고, 이외에 다수의 논문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