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재 · 학술
요약
일본제국은 왜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는 불법한 행위를 자행하면서까지 잘못된 역사의 길로 들어선 것일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시작된 저자의 한일관계사 연구는 요시다 쇼인의 『유수록』(1854)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낸다. 구미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열강에 앞서 주변국을 먼저 차지해야 하며, 특히 조선이 대륙 진출의 통로로 필수 선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요시다 쇼인의 주장을 접한 저자는 대한제국의 국권피탈은 한일 간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를 상대로 한 천황제 곧 황도(皇道) 파시즘이 펼칠 거대한 침략정책의 초입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이 책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제국이 동아시아를 선점하기 위해 새롭게 개발한 ‘동양’과 ‘동양사’와 천황제 파시즘과의 관계를 요시다 쇼인, 도쿠토미 소호, 나카 미치요, 나이토 고난 등 19~20세기 일본인 학자와 그들의 주요 도서를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일본사, 동양사, 서양사 3분과 역사교과서 42종과 도쿠토미 소호의 요시다 쇼인 관련서 및 다수의 신문기사와 칼럼, 『근세일본국민사』와 쇼와 시대 만들어진 국민독본 성격의 책자 5종 등 수많은 문헌의 연구뿐 아니라 주요 인물들의 연고지를 직접 현지 답사한 저자의 노력이 깃든 역작이다. 특히 저자는 나카 미치요가 3분과 교과서 채택을 주장한 후 만들어진 1902년의 교과서에 이미 한국사가 동양사가 아닌 일본사 교과서에 들어가 있는 충격적인 사실도 밝혀냈다.
출판사 서평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왜 새로운 역사공간으로서
‘동양’, 그리고 ‘동양사’를 개발했을까
이 책은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의 첫째 권으로,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제국이 ‘동양’, ‘동양사’를 새롭게 개발한 것과 천황제 파시즘의 상관관계를 파헤친 역사서이다.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는 일본의 ‘동양’ 제패 이데올로기 생산의 주요 조직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 책은 그중에서도 ‘동양’과 ‘동양사’ 개발과 황도주의 파시즘을 선전 보급한 대학과 언론계를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
오늘날 ‘동양’과 ‘동양사’는 지역 또는 역사연구 분야나 교과목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나, 이 용어는 19세기 중·후반 동서가 새롭게 만난 시기 서양 문명 수용에 가장 앞선 일본이 주변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특별한’ 의도로 새로 만들어낸 단어였다. 메이지 정권은 천황제 ‘왕정복고’ 당시 서양 열강에 앞서 이웃 나라를 선점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세우고 있었으며, 입헌군주국으로서 정치체제가 자리 잡는 시점에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신교육 장치를 마련하고자 했다. 서양 열강에 앞서 일본제국이 주변국을 선점한 세계는 곧 일본제국의 천황이 다스리는 세계로서, 이를 ‘동양’이라고 일컬으며, 이 세계를 개척하는 데 필요한 역사연구와 교육을 위해 ‘동양사’란 영역을 새로이 설정, 개발한 것이다.
이 책은 동양사 용어의 유래와 이를 빠르게 받아들인 도쿄대학과 교토대학의 동양사 인식 현황을 비롯해 메이지 정부의 대외 침략주의를 다룬다. 특히 일본의 ‘동양사’ 개발에 주목한 저자는, 1894년 나카 미치요의 3분과 제안으로부터 8년이 지난 1902년, 러일전쟁 발발 2년 전 문부성에서 만든 일본사, 동양사, 서양사의 3분과 교과서를 직접 조사하기 시작한다.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 역사가 동양사로 배치되었으니 한국사 또한 동양사에 들어가 있을 것이라 여긴 것과 달리 충격적이게도 한국사는 일본사 교과서에 포함되어 있었다. 강제병합 8년 전부터 일본은 이미 ‘역사합병’을 저지른 것이었다. 또한 ‘동양사’는 중국 북방인 만주, 몽골의 땅에서 여러 유목민족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다루었는데, 이는 일본제국의 중국 본토 침략을 정당화할 역사적 근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 것에 불과한 것임을 밝혀내고 있다.
이어 저자는 요시다 쇼인의 평전을 쓴 도쿠토미 소호의 여러 신문 논설과 저서를 황도주의 개발의 관점에서 다시금 살폈으며,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대동아전쟁이 벌어질 때 도쿠토미 소호가 개발한 황도 파시즘이 어떻게 국민독본 성격의 저서들을 통해 널리 퍼지게 되었는지를 살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저자는 일본의 대한제국의 국권을 탈취한 일이 두 나라 사이의 문제를 넘어 19세기 중반 이래의 동아시아사 전체에 대한 성찰의 문제와 연동되어 있음을 독자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일본이 근대화에 유일하게 성공한 동아시아 국가라는 ‘메이지유신’의 ‘신화’가 실상은 천황제 국가주의로 동아시아 세계를 독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직시하는 것이 곧 일제 식민사학을 제대로 비판하는 길임을 설파하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일본의 침략적 역사인식과 역사교육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데도 지금까지 이에 대한 인지와 비판이 없었다는 것은 동아시아 역사학이 크게 반성해야 할 점이며, 이를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21세기 동아시아의 평화를 기원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관련 자료 확보와 현지 답사 등
연구를 위한 저자의 노력이 돋보이는 역작
― 이 책의 구성과 주요 내용
이 책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제국이 동아시아를 선점하기 위해 새롭게 개발한 ‘동양’과 ‘동양사’와 천황제 파시즘과의 관계를 요시다 쇼인, 도쿠토미 소호, 나카 미치요, 나이토 고난 등 19~20세기 일본의 학자와 그들의 주요 도서를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전체 3부로 이루어진 이 책의 제1부에서는 나카 미치요가 어떤 경위로 ‘동양사’를 제창했으며, 이를 수용한 3분과 교과서가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일본국회도서관 소장본 42종을 대상으로 살폈다. 더불어 나카 미치요의 생전 활동에 대해서는 그의 친우 미야케 요네키치의 「문학박사 나카 미치요군전」을 참고할 수 있는데, 해당 번역 원고는 한국역사연구원 홈페이지(historykorea.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2부에서는 도쿠토미 소호의 요시다 쇼인에 관한 저술과 여타의 저술을 분석함으로써 황실 중심주의 사상의 전개 과정을 살폈다. 이 과정에서 무려 100권에 달하는 『근세일본국민사』의 서명을 조사하고 그 목록을 부록으로 정리해 실었다.
제3부에서는 『국민소훈』(1925)과 『쇼와일신론』(1926)부터 『필승국민독본』(1944)에 이르기까지 국민독본 성격을 띤 5종의 책자를 분석함으로써 도쿠토미 소호의 황도 사상이 어떻게 대중에게 확산되고 보급되었는지를 살폈다.
이 책에는 다수의 문헌 자료가 나온다. 대부분 오래된 사료인 만큼 쉽게 구하기 어려웠음에도 저자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사료를 확보하고자 했으며, 주요 인물들의 연고지를 직접 현지 답사하는 등 동양사 개발과 천황제 파시즘의 상관관계를 밝혀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문헌 연구와 실제 답사가 어우러진 만큼 책의 밀도 또한 단단하게 엮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책 속에서
1894년 나카 미치요의 제안은 ‘지나사’를 ‘동양사’로 바꾸는 것 하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방사’를 ‘일본사’로, ‘외국사’를 ‘서양사’로 바꾸는 것까지 포함된 것이었다. 문부성은 즉각 이를 채택했지만 1902년 후반에 들어서야 일본사, 동양사, 서양사 3분과 교과서가 비로소 학생들에게 배포되었다.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데 그만큼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한국사에 관한 서술은 당연히 동양사 교과서에 나올 줄 알고 자료 분석에 임했다. 그런데 어느 동양사 교과서에서도 한국사 관련 서술을 찾아볼 수 없었다. 놀랍게도 한국사는 일본사 교과서에 들어가 있었다. ― 23~24쪽, 「프롤로그」 중에서
오늘날의 ‘동양’, ‘동양사’란 용어는 19세기 중·후반에 동서가 새롭게 만난 시기에 서양 문명 수용에 가장 앞선 일본이 주변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특별한’ 의도로 새로 만들어낸 단어이다. (중략) ‘동양사’는 중국 북방 곧 만주, 몽골의 땅에서 여러 유목민족이 명멸한 역사를 적극적으로 다루었다. 이것은 유목민족의 역사를 돋보이게 하려는 것보다 일본제국이 중국 본토를 지배할 역사적 근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 것에 불과했다. (중략) 일본제국은 한마디로 동쪽의 대영제국을 꿈꾸었다. 이를 목표로 새롭게 제패할 지역 세계를 일컬어 ‘동양’이라고 했다. ― 35·37쪽 「1장 ‘동양사’ 용어의 유래와 인식 현황」 중에서
메이지 신정부 초기에는 반대 세력의 저항으로 내정을 다스리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도 일찍부터 홋카이도, 류큐, 타이완, 조선을 상대로 일본의 영향권을 넓히는 침략 행위를 일삼았다. 이러한 주변 지역 또는 국가에 대한 강제점령 또는 도발은 후술하듯이 모두가 조슈 세력의 스승 요시다 쇼인이 증기선 시대에 일본이 서양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살아남을 길로 제시한 것을 실현하는 행위였다. 열강에 앞서 힘이 닿는 대로 주변국을 먼저 차지하는 것이 곧 일본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가르침을 국가의 교조(敎條)로 삼았다. 이처럼 메이지 신정부는 태생적으로 대외 침략주의가 국기(國基)였다. ― 66~67쪽, 「2장 메이지 정부의 대외 침략주의」 중에서
1885년 12월 내각제 도입에서부터 1889년 2월 「대일본제국헌법」 반포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제도적 변혁으로 일본제국은 천황제 국가주의 체제를 확립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이 작업은 독일 헌법을 모델로 했다고 하지만 국가주의 성향 전반은 독일에서도 유형을 찾아보기 어려운 면이 많다. 메이지 초기에는 구화주의(毆化主義)라 일컬어지던 프랑스, 미국의 자유주의 사조가 유행이었고, 이 사조가 자유민권운동의 흐름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1880년대 국가주의 체제 확립으로 상황은 크게 변했다. 제국헌법에 이어 천황의 「교육칙어」가 반포되었듯이, 국가주의 창달에는 교육 분야가 군사조직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했다. 모든 제도의 이행에서 국가주의 정신교육이 강조되었다. ― 77쪽, 「3장 1880년대 국가주의 체제 확립과 요시다 쇼인」 중에서
1894년 상반기 나카 미치요의 ‘동양사’ 제안은 곧 일본제국의 역사 3과 교과서 제도가 만들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즉, 개국 이후 서양 역사가 알려지면서 본방사, 지나사, 외국사로 구분되었던 역사 분야가 일본사, 동양사, 서양사로 ‘체계화’되었다. 이것이 천황의 「교육칙어」와 맞물려 역사교과서 제도에 먼저 반영되었다는 것은 일본제국 역사교육의 실체적 특성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 125쪽, 「5장 일본·동양·서양 3과 역사교과서 제도 수립과 천황제 국가주의」 중에서
‘동양 먼로주의’는 요시다 쇼인의 『유수록』이 그리는 일본 천황이 지배할 세계의 다른 표현이다. 요시다 쇼인은 태평양으로 격한 ‘이웃’ 미국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일본인의 캘리포니아 진출을 과제로 삼았다. 그 미국이 세계대전으로 부자 나라가 된 만큼, 지나에 대한 관심이 많을 것이며, 그렇다면 일본제국이 지금 도모하고 있는 동양 세계의 구축, 곧 조선과 만주를 발판으로 지나를 장악하고자 하는 일본제국의 계획과 충돌할 것이 자명하다는 것이 도쿠토미의 우려였다. 실제로 당시 미국이 중국 진출을 꾀한 흔적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과도한 자기방어 논리로 국민을 선동한 모양새이다. ― 221쪽, 「7장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도쿠토미 소호의 반미주의」 중에서
1923년 9월의 간토 대진재의 참사에도 붓을 놓지 않지 않았던 도쿠토미 소호는 1925년 2월에 『국민소훈(國民小訓)』을 세상에 내놓았다. 65쪽에 불과한 소책자였지만, 사회적 반응은 컸다. (중략) 이 책은 도쿠토미 소호 황도주의의 결정판이란 의미가 엿보이는 것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황실 중심주의는 일본 국민의 열쇠이다. 이 열쇠로서 일본 역사가 해명되고, 일본의 국체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열쇠가 있어서 일본의 사회적 기구를 알 수 있고, 일본에 관한 모든 문제, 거의 일체가 이 열쇠로 해석된다. 일본은 황실의 연장인 가족적 국가이다. 유신 이전에는 지나를 척도로 하고, 이후에는 구미를 표준으로 하여 일본이 없었다. 근래 마르크스 유물사관으로 황국의 사회기구를 해석하려 하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으로 우리 국체를 밝히려 하는 것은 모두 50보, 100보 차이의 오류이다.” 이 부분은 1910년대부터 저술을 통해 주장해온 황실 중심주의에 대한 자신감에 찬 언설이다. 구미의 모든 사상체계를 의식적으로 배제하는 논리이다. 『근세일본국민사』 집필을 통해 얻어진 자신감으로 여겨진다. ― 251·254쪽, 「8장 1920년대 대륙 진출과 도쿠토미 소호의 파시즘 저술」 중에서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태평양전쟁(Pacific War)’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 별도의 명칭을 내지 않고 중일전쟁 곧 ‘지나사변’을 포함하여 ‘대동아전쟁’이라고 불렀다. 대동아는 곧 1890년대에 처음 상정된 대일본제국 천황이 지배하는 새로운 동아시아 세계 곧 ‘동양’의 더 확장된 표현이었다. 요시다 쇼인이 1854년 제1차 투옥 때 옥중에서 쓴 『유수록』에서 제시한 주변국 선점론에서 마지막 대상으로 지정한 태평양 저편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일본제국 군인들은 사투를 벌였다. 그들은 도쿠토미 소호가 수십 년 동안 뿌린 황도 사상 마취제에 취하여 요시다 쇼인의 충직한 학도가 되어 황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었다. ― 297쪽, 「9장 1930~1940년대 전시체제와 도쿠토미 소호의 파시즘 국민독본」 중에서
이처럼 도쿠토미 소호가 긴 여정에서 도달한 곳은 “자유주의를 퇴치하라”고 외치는 자유, 자유주의 배척의 공간이었다. 젊은 시절 자유민권운동에 열정을 쏟던 그가 노년에 황실 중심주의, 황도 파시즘에 매몰되어 자유주의 배척자가 되었다. 그것은 도쿠토미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일본제국이 걸어온 길이었다. 조슈 세력이 도쿠가와막부를 타도하고 왕정을 복구하면서 내세운 존왕 사상이 오도한 긴 여정이었다. 주변국 선점론을 내세운 요시다 쇼인이 한 사상가로 남지 않고 성자(聖者)처럼 받들어진 것이 불러온 종국이었다. ― 308쪽, 「9장 1930~1940년대 전시체제와 도쿠토미 소호의 파시즘 국민독본」 중에서
차례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를 출간하면서
책머리에
프롤로그 근대 일본 역사학의 국가주의 시원 단초를 찾아
1. 연구의 실마리와 인연
2. 1902년, 일본사에 강제 편입된 한국사
3. 책의 구성과 관련 자료 확보 과정
4. 현지답사: 하기, 야마구치, 모리오카
제1부 ‘동양사’ 개발과 침략주의 역사교육: 요시다 쇼인과 나카 미치요
1장 ‘동양사’ 용어의 유래와 인식 현황
1. 천황이 지배하는 새로운 동아시아 세계 ‘동양’
2. 도쿄대학의 ‘동양사’ 인식 현황
3. 교토대학의 ‘동양사’ 인식 현황
4. 일본 학계의 동향과 인식
2장 메이지 정부의 대외 침략주의
1. 도쿠가와막부와 존왕파의 대결
2. 메이지 신정부의 중앙집권체제
3. 메이지 신정부의 주변 지역 및 국가에 대한 침략정책
4. 자유민권운동과 세이난전쟁
3장 1880년대 국가주의 체제 확립과 요시다 쇼인
1. 내각제의 성립
2. 제국헌법의 제정과 「교육칙어」 반포
3. 국가주의 학제 정비
4. 국가주의 교육의 바탕, 요시다 쇼인 현창
5. 요시다 쇼인의 주변국 선점론
4장 서양식 역사학 수용과 나카 미치요의 ‘동양사’ 제안
1. 구화주의 시대의 일본 역사학
1) 일반 지식계의 서양 문물 수용
2) 서양 역사학 수용 양상
2. 1894년 나카 미치요의 ‘동양사’ 제안 배경
1) 양부 나카 미치타카와 요시다 쇼인
2) 나카 미치요의 학문적 성장 과정
3) 1890년 「교육칙어」 반포와 나카 미치요의 ‘동양사’ 제안
3. ‘동양사’ 과목 제안 전후의 학계 상황
5장 일본·동양·서양 3과 역사교과서 제도 수립과 천황제 국가주의
1. 일본국회도서관 소장 구 역사교과서 조사(I)
1) 구 역사 3과 교과서의 발행 시기 분포
2) 1902년 상반기 이전 ‘과도적’ 역사 3과 교과서
2. 일본국회도서관 소장 구 역사교과서 조사(II)
1) 1902년 후반~1910년 역사 3과 교과서 체제의 발전
2) 동양사가 아니라 일본사에 편입된 한국사: 역사합병의 만행
3) 1910년 ‘한국병합’ 후 간행 교과서: 복속의 역사 강조
3. 도쿄제대·고등사범학교 출신 일색 저자들: 어용 역사교과서 제작
〈자료 1〉 일본국회도서관 소장 메이지~쇼와 연간 역사교과서 검색 결과
제2부 러일전쟁 이후 도쿠토미 소호의 황실 중심주의
6장 도쿠토미 소호의 평전 『요시다 쇼인』
1. 저널리스트 도쿠토미 소호의 사상적·정치적 편력
1) 도쿠토미 소호 연구의 필요성
2) 민권운동가 도쿠토미 소호와 『고쿠민신문』
3) 『요시다 쇼인』(초판): 대일본주의로의 전향
4) 청일전쟁과 『고쿠민신문』의 전쟁 홍보
2. 조슈벌과의 밀착과 침략주의 미화 선봉
1) 삼국간섭의 ‘굴욕’: 백벌 타도론 제창
2) ‘정치가’ 도쿠토미 소호, 『고쿠민신문』의 정부 기관지화
3) 가쓰라 다로 내각과의 밀착
4) 『요시다 쇼인』(개정판): 황도주의 제창
7장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도쿠토미 소호의 반미주의
1. 『경성일보』 감독 도쿠토미 소호: 총독 데라우치와의 밀착
1) 총독 데라우치의 『경성일보』 감독 초빙
2) 「조선 통치의 요의」 10조
2.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반미 저술
1) 조슈벌의 균열과 ‘다이쇼정변’
2) 가쓰라 신당과 도쿠토미 소호의 『시무일가언』(1913)
3)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도쿠토미의 ‘동양 먼로주의’ 제창
제3부 대륙 침략과 도쿠토미 소호의 황도 파시즘 국민독본
8장 1920년대 대륙 진출과 도쿠토미 소호의 파시즘 저술
1.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산둥 출병과 도쿠토미 소호의 지나론
1) 국제연맹체제와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
2)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성립과 대륙 진출 정책의 복원
3) 다나카 내각의 산둥 출병과 도쿠토미의 미국 경계론
2. 도쿠토미 황도주의의 새로운 저술 세계
1) 100권의 거질 『근세일본국민사』 집필(1918~1954)
2) 황도주의 교본 『국민소훈』(1925)
3) “미천한 신하의 상소”: 『쇼와일신론』(1927)
9장 1930~1940년대 전시체제와 도쿠토미 소호의 파시즘 국민독본
1. 1930년대 이후 전시체제와 도쿠토미의 황도주의 ‘일본학’ 제창
1) 군부의 황도파 등장과 도쿠토미 소호
2) 도쿠토미 소호의 『고쿠민신문』 퇴사와 보국 언론활동
3) 황도주의 ‘일본학’ 제창(I): 『쇼와국민독본』(1939) 출판 경위
4) 황도주의 ‘일본학’ 제창(II): 『쇼와국민독본』의 요지
2. 1940년대 전시 상황과 도쿠토미의 필승 기원 파시즘 국민독본
1) 만주사변에서 대동아전쟁까지
2) “만주국 출현은 세계의 기적”: 『만주건국독본』(1940)
3) “자유주의를 퇴치하라”: 『필승국민독본』(1944)
3. 요시다 쇼인에 관한 다른 저술들의 경향
1) 쇼와 연간에 폭증한 요시다 쇼인 관련 저술들
2) 쇼와 연간 관련 저술의 주요 경향(I): 학술적 성과
3) 쇼와 연간 관련 저술의 주요 경향(II): “어뢰를 안고 몸을 던지는 호국의 혼”
에필로그 요시다 쇼인의 ‘주변국 선점론’에서 천황제 파시즘까지
부록
1. 『근세일본국민사』 목차 및 발간 연도 일람
2. 『증보 국민소훈』(1933) 목차
3. 『쇼와일신론』(1927) 목차
4. 『필승국민독본』(1944) 목차
본문의 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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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 이태진
서울대학교 학부 및 대학원 사학과에서 한국사를 전공하고, 경북대학교 교양학부 및 사학과를 거쳐 1977년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부임하여 2009년까지 재임하였다. 조선시대의 사회사, 정치사를 연구하다가 1992년부터 근대 한일관계사, 특히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의 불법성에 관한 연구에 종사하였다. 근대사와 한일관계에 관한 저서로 『고종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 연구: 조약 강제와 저항의 역사』, 『끝나지 않은 역사: 식민지배 청산을 위한 역사인식』 등이 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서 자연 이상 현상 기록 2만 5,300여 건을 뽑아 이를 분석하여 1490년부터 1760년까지 270년간이 이른바 소빙기(little ice age)의 재난 현상기란 것을 확인하고 이를 국제 천문학 저널에 보고하고, 『새 한국사』에서 조선 중기의 역사를 천재지변 극복의 역사로 조명하였다.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한일역사가회의 한국 측 운영위원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2006년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