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재 · 학술
요약
조선 후기 문예부흥을 이끈 군주 정조가 궁중회화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활용했는지를 들려주는 미술사 연구서. 시각언어의 영향력을 중시한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전달하고자 화원을 직접 육성하고 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비했다. 그의 정치적 메시지는 잘 짜인 각본처럼 그림에 담겼으며, 그 그림들은 목적에 맞게 배포되고 설치되었다.
이 책은 정조가 특별히 지시한 궁중회화를 중심으로 그 안에 담긴 정치적 메시지를 찾아본다. 사도세자의 사적을 그린 그림을 통해서는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추숭 사업을, 문효세자의 탄생과 책봉에 대한 그림을 통해서는 그의 첫아들에 대한 지원 계획을 살폈다.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 행차를 시각화한 《화성원행도병》은 궁중회화의 결정판으로, 그 제작과 배포 과정을 상세히 살펴봄으로써 정조의 회화정책에 담긴 종합적 구상이 무엇인지 들려준다.
출판사 서평
궁중회화, 정조와 그의 시대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창
― 정조는 궁중회화를 어떻게 활용함으로써 국정의 시각화를 이루어냈는가
이 책은 조선의 문예부흥을 이끈 군주, 정조를 궁중회화의 실질적인 제작 주체로 부각한 미술사 연구서이다. 궁중회화란 궁궐 안에서 제작되고 소용된 그림을 일컫는데, 이때의 ‘궁중’은 건축 공간으로서의 궁궐뿐 아니라 왕실과 조정이라는 상징적인 공간까지 포괄한다. 이렇게 넓게 정의된 궁중회화의 범주에는 왕과 신하의 초상화, 국가 의례를 그린 궁중행사도, 의궤와 같은 관찬서적에 포함된 삽화, 왕실의 유적지를 그린 사적도 등이 포함된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궁중회화 작품들은 정형화되어 있기에 왕과 그 시대의 요구를 읽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궁중회화 연구는 국왕을 하나의 시대적 배경이나 혹은 서화 취미를 가진 개인으로 다루어왔다. 더구나 관료들이 관습적인 관행을 통해 화원에게 제작을 의뢰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국왕의 개입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정조를 궁중회화의 주체로 부각하여 살폈다. 이러한 연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정조대는 앞선 시기와 달리 국왕의 궁중회화에 대한 개입이 상대적으로 명료하게 드러난 시기였다. 특히 정조는 도화서 외에도 왕의 직속 화원기구인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畫員)을 규장각 내에 설치해 운영하여 시각매체에 대한 통제력을 높였을 뿐 아니라, 초상화와 궁중회화의 제작 전반에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 이 책은 그동안 개별적으로 연구되어온 화원제도와 초상화, 사적도, 행사도 등을 정조의 회화정책이라는 시각에서 종합적으로 살폈다.
유학 군주를 자처한 정조는 검소와 절제를 실천한 만큼, 노골적으로 미술을 정치의 도구로 활용해온 서양의 군주나 중국의 황제와는 달랐다. 정조는 그들처럼 궁전의 치장이나 개인의 감상을 위한 그림을 요구하는 대신 왕실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국가사업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그림을 이용하였다. 이 책은 정조가 특별히 지시한 궁중회화, 즉 어진과 신하들의 초상을 비롯해 《월중도》, 《진하도》, 《문효세자보양청계병》, 《문효세자책례계병》, 《을사친정계병》 등의 사적도와 계병, 《화성원행도병》 등의 행사도를 중심으로 그 안에 담긴 정치적 메시지를 집중 분석한다. 이를 통해 시각언어의 영향력을 잘 인지하고 있었던 정조가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어떻게 궁중회화를 활용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으며, 정조의 회화정책에 담긴 종합적인 구상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그림이나 문헌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정조의 정치적 의도를 미술사적 분석을 통해 추적하는 과정을 담아낸 이 책은, 궁중회화라는 또 하나의 창을 통해 정조와 그의 시대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어진과 신하들의 초상화 제작에 담긴 정조의 정치적 함의
왕의 초상을 그린 어진 제작 사업은 특히 숙종대 이후 왕실의 중요한 사업이었다. 숙종과 영조가 주로 태조나 선왕의 어진을 복원하는 작업을 통해 어진 제작의 명분을 다졌다면, 정조는 자신의 어진 제작 사업에 주력하였다는 차이가 있다. 죽은 왕과 달리 현왕의 어진은 제사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한 번 그려지면 다시 공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조는 자신의 어진에 대한 시각적 영향력을 어떻게 확보하였을까?
이 책에서는 어진의 제작과 봉안, 그리고 사후 관리 과정에서 일어나는 관전 행위들에 주목하였다. 정조는 신하들이 어진을 바라보는 관전 행위를 의례화함으로써 자신의 초상화가 공개되는 방식을 특별히 규정하였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어진 제작을 논하는 자리에 신하들의 초상을 가져다 보면서 화상찬(畫像讚)을 내림으로써 군신관계의 논의를 확대해나갔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초상화가 죽은 자를 위한 영정에서 나아가 현재의 군신관계를 정립하는 매개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이 책에서는 일본 덴리대학 소장본인 《초상화첩》을 중심으로 신하의 초상화에 내려진 정조의 화상찬은 살펴보았다.
사적도를 통한 왕실 행적의 역사화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사적도는 왕실의 공적 공간을 그린 그림이다. 이는 왕실 인물의 탄생과 죽음에 연관된 태실, 잠저, 능묘를 비롯해 왕의 초상이나 신주를 모신 진전, 종묘, 왕실 인물의 공적이나 일화와 관련된 유적지 등을 포함한다. 이 책에서는 영월의 단종 사적을 재현한 《월중도》와 사도세자 관련 유적인 사당과 태실, 온양행궁 유적을 그린 그림들을 살폈다. 이러한 정조의 사적 복원 및 중건 사업은 모두 단종과 사도세자의 복권을 목적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조의 사적 복원 사업은 엄밀히 말하면 재건 사업에 가까웠다. 단종의 시에 등장하는 자규루 터를 발굴하고는 정자를 새로 지어 올린다거나, 공식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도세자의 회화나무 유적지를 온양 지역민의 기억에 의존해 중건하였다. 다시 지어진 정자는 단종을 추모하는 사적이 되었고, 온양의 회화나무는 사도세자의 온행을 기억하는 기념수가 되었다. 단종 관련 사적 사업이 이미 숙종대부터 이어온 왕실 사업의 연장선이었다면, 사도세자의 복권 사업은 그의 정통성에 직결된 중요한 문제였기에 정조의 재위 기간 내내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렇듯 정조는 사적도를 통해 왕실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였다.
궁중 계병을 통해 들여다본 세자의 위상 강화 과정
계병이란 본래 계원들이 행사를 치른 후 그림을 나누어 갖는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전통을 따라 정조대의 계병 역시 표면적으로는 왕실 행사에 참여한 관원들이 발의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계병은 관원들 간의 유대감보다 국가의 공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책에서는 정조대의 계병 중에서 왕실 행사를 주제로 한 4건의 병풍, 즉 《진하도》(1783), 《문효세자보양청계병》(1784), 《문효세자책례계병》(1784), 《을사친정계병》(1785)을 주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들 계병은 정조의 첫 아들인 문효세자의 탄생, 교육, 책봉, 권위 부여와 연관되어 있다. 저자는 이들 계병의 내용과 발문 분석을 통해 계병의 제작이 사실상 국왕 정조의 주도에 의해 진행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각 행사의 장면과 배경 분석을 통해서 일련의 행사들이 문효세자의 위상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교하게 고안된 것임을 상세히 드러내고 있다.
《화성원행도병》, 화성 행차의 시각화가 말하는 것
저자가 마지막으로 정조의 정치적 시각언어로 선정한 것은 《화성원행도병》이다. 이 그림은 정조가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소에 행차한 사건을 그린 8폭 병풍이다. 당시의 화성 행차는 단순한 원행을 넘어 회갑 축하 연회, 화성 발전을 격려하는 행사, 장용영의 군사 훈련, 국왕의 대민 접촉 등 복합적인 일정을 포함한 대규모 사업이었다. 정조가 심혈을 기울인 사업인 만큼 《화성원행도병》은 당대 궁중행사도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화성원행도병》이 담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 외에도 이 그림의 제작에서 배포까지를 폭넓게 살펴보았다. 어떻게 이전에는 한 번도 그려진 적이 없었던 새로운 주제의 행사도가 혁신적인 구도와 화풍으로 그려질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바로 원행을 준비한 정리소와 그 결과를 기록한 의궤청 조직에 있다. 원행을 준비한 관원들은 규장각 각신이 중심이었고, 이를 그림으로 그린 화원들은 규장각에 소속된 차비대령화원이 중심이었다. 이 책의 시작에서 언급한 정조의 화원 제도 개혁, 차비대령화원제가 일궈낸 성과이기도 하다.
한편 저자는 당시 병풍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까지도 담고 있어 《화성원행도병》의 효과가 어떠했는지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분석을 통해 정조가 의도한 행사의 의미는 무엇이며, 이는 구체적으로 《화성원행도병》을 통해 어떻게 시각화되었고, 사람들에게 기억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책 속에서
정조의 시각으로 조선 후기 궁중회화를 연구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우선 정조가 직접 붓을 든 것이 아니었기에 그가 어떤 과정을 통해 회화 작업에 개입했는지 연결고리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연구 과정 내내 작품이 누구의 손과 입과 생각을 거쳐 제작되었는지 조심스럽게 추적하였다. 화원과 신료, 그리고 왕 사이의 밀접한 전달체계와 이해관계를 밝히는 것이 관건이었다. 수많은 작품을 살피면서 그런 단서가 나올 때마다 그림과 관련된 여러 주체들을 서로 연결하고자 노력했다. ― 6쪽, 「책을 펴내며」 중에서
정조는 조선의 여러 왕 중에서도 특히 시각언어의 영향력을 잘 인지하고 있었던 국왕이다. 정조는 자신의 의도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화원을 직접 육성하고 제도를 체계화하였다. 그의 정치적 메시지는 잘 짜인 각본처럼 그림에 담기게 되었고, 그 그림들은 목적에 맞게 배포되고 설치되었다. 궁중회화가 어느 시대나 이처럼 논리적인 시각문법과 체계적인 제도를 갖추었던 것은 아니다. 이 책이 조선시대 궁중회화를 읽어내는 데 유의미한 성과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정조라는 인물의 특수성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 7쪽, 「책을 펴내며」 중에서
정조에게 초상화는 왕의 권위를 강화하고 군신간 소통을 주도하는 매개였다. 정조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은 초상화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었다. 우선 그는 자신의 어진을 제작하는 일을 규장각 각신에게 일임하고 완성된 어진을 규장각 주합루에 봉안하게 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규장각의 위상을 높였을 뿐 아니라, 어진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효과가 있었다. ― 170∼171쪽, 「4장 신하 초상의 열람과 제작」 중에서
정조대에 새로 지어진 자규루는 본래 이름이 매죽루(梅竹樓)였는데, 단종이 이곳에서 자신을 두견새(자규)에 비유하여 애절한 심정을 노래하였다는 일화가 전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자규루’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 정자는 정조대에 복원되면서 본래의 ‘매죽루’란 이름 대신 ‘자규루’라는 현판을 받았다. 단종이 올랐던 정자가 그대로 복원된 것이 아니라 단종에 대한 후대의 해석이 정자의 모습으로 지어진 것이다. 즉 숙종과 영조가 과거를 수정하고 추가한 것과는 달리 정조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과거를 새롭게 재건하여 가시화하기를 바란 것이다. ― 193∼194쪽, 「5장 정조의 단종사적 정비와 《월중도》」 중에서
정조의 영괴대 사업은 다른 사도세자 사적과는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을 지닌다. 우선 사당, 무덤, 태실이라는 전통적으로 공인된 왕실 사적이 아니라 한 행궁의 회화나무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중략) 온양행궁의 회화나무는 무엇을 대변하는가. 바로 사도세자에 대한 기억이다. 당시 중앙에서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36년간 지방민들 사이에서는 그 나무가 사도세자가 심은 것이라는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정조가 영괴대 사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회화나무가 사도세자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237∼238쪽, 「6장 정조의 사도세자 추숭 작업과 사적도」 중에서
대부분의 기록화는 행사가 이루어지는 전각의 정면에서 조망하였고 늘 북쪽이 위로 상정되었다. (중략) 《문효세자보양청계병》은 북을 상위로 두는 전통을 깨뜨리고 동쪽을 상위에 두었다. 방위와 같은 기록화의 시각적 관습은 상징적인 체계로 이미 굳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를 거스른다는 것은 단지 우연이라 볼 수 없다. 이는 의례에서 방위가 가지는 본래 의미를 변형하고자 하는 계획된 의도로 보아야 한다. 동쪽을 상위에 둠으로써 원자는 신하들과 동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국왕처럼 두 신하들 위에서 남면(南面)하듯이 그려졌다. 그 결과 그림의 시각적 구도는 원자가 보양관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두 보양관 위에 군림하는 형태가 된 것이다. ― 285~287쪽, 「8장 문효세자의 원자 추대: 《문효세자보양청계병》(1784)」 중에서
《을사친정계병》에서는 검과 활, 창을 든 임금의 시위대가 모두 100여 명이 넘는다. (중략) 기존의 친정도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호위군사가 이 그림에서 장대하게 표현된 것은 정조대에 강화된 국왕 경호를 반영할 뿐 아니라, 국왕의 위용을 시각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을사친정계병》은 국왕을 중심으로 고도로 위계화된 구조를 갖고 있다. 이는 실제 건축 공간에 배열된 의례상의 구조인 동시에 신분적인 구조이며, 또한 전체 화면을 지배하는 시각적인 구조이기도 하다. ― 349∼351쪽, 「10장 세자궁의 친림도정: 《을사친정계병》(1785)」 중에서
1795년 원행은 정리소라는 임시조직의 가설을 통해 비용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면서, 명령체계를 효율적으로 운영할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용과 인력이 많이 동원되는 시각매체가 『원행을묘정리의궤』나 《화성원행도병》을 통해 과감하게 배포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배경에 정리소와 같은 제작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377쪽, 「11장 《화성원행도병》의 제작과 분급」 중에서
정조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단순히 실용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았듯이 〈한강주교환어도〉 역시 단순히 주교의 객관적 ‘도해’라고만 설명할 수 없는 성격이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주교도〉가 단지 주교가 설치된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면, 병풍의 〈한강주교환어도〉에는 주교 위의 장대한 어가 행렬뿐 아니라 강가를 가득 메운 구경 나온 백성들을 볼 수 있다. 일찍이 정조는 1791년 차비대령화원의 녹취재 화목으로 ‘주교의 깃발 구경[舟橋瞻旄]’이란 제목을 출제한 바 있다. 이 시험에서 화원들은 주교가 이뤄내는 장관(시각적 스펙터클)과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 목표였다. 즉 정조는 이미 주교의 실행 초기부터 주교의 실용성뿐 아니라 스펙터클한 시각적 효과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447쪽, 「12장 《화성원행도병》의 내용과 의미」 중에서
정조는 국왕 직속의 화원제도를 운영하여 시각매체에 대한 통제력을 높였을 뿐 아니라, 초상화와 궁중회화의 제작 전반에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 그리고 신하에게 어진을 공개하고 궁중행사도를 분하함으로써 그 시각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조가 세운 차비대령화원제도를 비롯해 어진의 제작과 의례, 정리소의 행사도 주관은 하나의 전통이 되어 19세기 궁중회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 459쪽, 「에필로그: 궁중회화를 통해 이루어낸 국정 운영의 시각화」 중에서
차례
책을 펴내며
프롤로그 정조와 그의 시대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창, 궁중회화
I 정조대 궁중화원제도의 변화
1장 도화서와 차비대령화원
1. 정조 이전의 화원제도 변천과 정조의 도화서 개혁
1) 조선 초기의 변화
2) 성종대의 변화: 도화원에서 도화서로
3) 숙종과 영조의 화원정책
4) 정조의 도화서 개혁
5) 정조의 도화서 개혁의 의미와 한계
2. 정조대 도화서와 차비대령화원제의 비교
1) 소속과 직제
2) 급여
3) 녹취재
4) 화원 의절
2장 정조대 차비대령화원의 업무와 운영
1. 차비대령화원의 업무
1) 차비대령화원의 고유 업무
(1) 어제 인찰
(2) 어필 비문의 조성: 전흥과 탁본
(3) 규장각 도서의 인찰과 도설 작업
2) 차비대령화원과 일반 화원의 공동업무
(1) 도감 사역
(2) 어진 제작
2. 차비대령화원의 세대 분석
1) 정조대 이전의 ‘차비대령화원’
2) 원차비대령(1776~1783년 차정)
3) 초대 차비대령화원(1783년 차정)
4) 제1차 추가된 차비대령화원(1787~1791년 차정)
5) 제2차 추가된 차비대령화원(1794~1796년 차정)
3. 차비대령화원제도의 실상과 한계
II 어진과 신하 초상의 제작
3장 어진의 제작과 진전의 운영
1. 정조 이전의 전통: 숙종·영조 연간을 중심으로
1) 외방 진전
2) 한양의 진전: 영희전과 선원전
3) 어진 제작과 진전제도의 변화
2. 영조 어진의 처리와 모사
1) 어진의 봉안과 진전 정비
2) 영조 어진의 모사 시도
3. 정조 어진의 제작과 봉안
1) 규장각: 어진의 제작·관리 기관
2) 정조 어진의 형식과 의미
3) 어진 제작 과정에서의 논의
4) 어진 관계 의례의 제정과 정비
5) 정조의 어진 봉안: 규장각, 경모궁, 현륭원
4장 신하 초상의 열람과 제작
1. 정조의 어진 도사 시 제작된 신하 초상
2. 정조가 하사한 신하 초상과 화상찬: 덴리대학 도서관 소장 《초상화첩》
1) 초상화첩의 어제 분석
2) 어제 하사의 경위와 의도
3) 초상화의 양식 분석
4) 《초상화첩》의 성격
III 사적도를 통한 왕실 행적의 역사화
5장 정조의 단종사적 정비와 《월중도》
1. 《월중도》의 내용과 제작 시기
2. 정조의 단종 유적 정비와 《월중도》: 기억의 재건
3. 『장릉사보』와 《월중도》: 기록과 재현을 통한 공식화
4. 추모의 정치학과 《월중도》
6장 정조의 사도세자 추숭 작업과 사적도
1. 왕실 사적 전통과 경모궁·현륭원 의궤도설
1) 사도세자의 사당, 경모궁의 재현
2)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의 재현
2. 다른 전통의 시작과 사도세자의 〈장조태봉도〉
3. 기억의 수집을 통한 사적의 발명과 〈영괴대도〉
IV 궁중 계병을 통한 세자의 위상 강화
7장 문효세자 탄생과 사도세자 존호 추상: 《진하도》(1783)
1. 1783년 사도세자의 존호 추상과 진하례
2. 진하례의 의례와 재현
3. 관아 배경의 의미
4. 제작과 분급 방식
8장 문효세자의 원자 추대: 《문효세자보양청계병》(1784)
1. 문효세자 탄생 시 정국 동향
2. 원자 보양관의 임명과 상견례의 진행
3. 서문과 연시를 통해 본 제작 동기
4. 보양관 상견례의 의례와 재현: 사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5. 배경 공간의 상징성: 왕실과 백성에까지 미치다
9장 문효세자의 책봉: 《문효세자책례계병》(1784)
1. 정조대 시강원 위상 강화
2. 좌목과 제작 주체 분석
3. 〈인정전선책도〉와 선책의
4. 〈중희당수책도〉와 수책의
10장 세자궁의 친림도정: 《을사친정계병》(1785)
1. 정조 이전의 친정도 전통
2. 정조대 인사제도의 변화
3. 좌목과 제작 주체 분석
4. 행례 장면과 친림도정
5. 창덕궁 중희당과 세자
V 《화성원행도병》을 통한 화성 행차의 시각화
11장 《화성원행도병》의 제작과 분급
1. 《화성원행도병》의 명칭
2. 제작 기관과 화원
3. 분급과 수용
4. 《화성원행도병》 이본 비교
12장 《화성원행도병》의 내용과 의미
1. 전체 구성과 의미
2. 연향도 전통과 혁신: 〈봉수당진찬도〉와 〈낙남헌양로연도〉
1) 〈봉수당진찬도〉와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
2) 〈낙남헌양로연도〉와 화성에서 베푼 양로연
3. 문풍의 존숭과 진작: 〈화성성묘전배도〉와 〈낙남헌방방도〉
1) 〈화성성묘전배도〉와 공자 성묘 전배
2) 〈낙남헌방방도〉와 화성 인재 등용
4. 군대를 통한 훈련과 통합: 〈서장대야조도〉와 〈득중정어사도〉
1) 〈서장대야조도〉와 화성 성역에서의 군사훈련
2) 〈득중정어사도〉와 어사례와 불꽃놀이로 마무리한 원행의 의미
5. 백성을 위한 행차: 〈환어행렬도〉와 〈한강주교환어도〉
1) 〈환어행렬도〉와 어가 행렬의 상징성
2) 〈한강주교환어도〉와 경세치용의 시각화
에필로그 궁중회화를 통해 이루어낸 국정 운영의 시각화
부록
표 1. 1783년 11월부터 1800년 5월까지 편찬된 의궤에 기록된 화원 명단
표 2. 숙종~정조 연간 현왕(現王) 어진에 대한 의례와 출처
표 3. 단종 관련 서적 편찬
표 4.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복권과 상존호
본문의 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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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 유재빈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조대 궁중회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옌칭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객원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에 『예술의 주체』, 『명화의 탄생 대가의 발견』,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역사와 사상이 담긴 조선시대 인물화』(이상 공저) 등이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조선 및 청의 궁중회화이며, 조선 후기 판화와 물질문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