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재 · 학술
서구인에 의해 이상화된 그리스 문화의 실체
서구인들이 서양 문화의 근원으로 여기고 있는 그리스 문화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비서구인의 시각에서 분석한 책이다. 지은이는 근세 서구인들의 시각을 통해서 이상화되거나 거부되는 과정에서 ‘고전’ 그리스와 ‘비잔티움’ 그리스, 그리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이후의 ‘현대’ 그리스가 각각 분리된 존재로서 인식되어 온 그리스 세계의 성격을 통시적으로 고찰하고, 전체 서양 문명의 흐름에서 그리스인들이 어떠한 위치에 서 있었으며, 이들의 자의식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그리스 테살로니키 아리스토텔레스 대학에서 선원근법의 기원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저자는 지금까지 그리스 미술과 문화에 관한 다수의 저서를 잇달아 발표해 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의 이미지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 책은 서양 문명의 기원이자 토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리스의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고 수용되어 왔는지를 역추적하는 여정이다. ‘그리스’는 우리에게 친숙하면서도 낯선 존재이다. 고대에 헬라스로 알려졌으며 이후 중세와 근세를 거치는 과정에서 그리스로 불렸다가 현대에 와서 다시 헬라스라는 이름을 되찾은 이 문화권은 역사학자들과 예술가들에게 무한한 탐구의 대상이었으며, 이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각색되고 재구성된 이미지는 동시대의 현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 왔다.
현대 고전 고고학과 고전 미술사학의 토대가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가상적 이미지들이 만들어 낸 양식사적 틀이었다. 서유럽 고전주의자들에 의해서 이상화된 고대 헬라스의 표상은 비잔티움과 포스트 비잔티움 시대 동안 정교회 문화의 전통을 발전시켜 온 근세 그리스인들이 유럽 사회에서 타자화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지만, 현대 국가로 독립하는 과정에서는 역으로 정치적, 문화적 지지대가 되었다.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그리스 미술사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충돌, 헬레니즘의 중심과 변방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근세 그리스 비잔티움 문화와 서유럽 고전주의 문화 사이의 상호 작용이다. 이들을 통해서 ‘그리스’라는 대상이 서양 문명에서 차지하는 위치뿐 아니라 한 사회 집단의 문화에 대한 역사 저술 행위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 미술사에서 고전 고고학으로
‘그리스 조각과 같이 아름다운 몸’이라는 상투적 표현이 말해 주는 것처럼 고대 그리스 조각은 서양미술사에서 현재까지도 자연주의와 이상주의의 전형이자 교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폴리클레이토스, 미론, 페이디아스, 프락시텔레스 등 그리스 고전기 거장들에 대해서 플리니우스를 비롯한 로마 시대 저자들이 남긴 수사적 묘사들은 근세 이후 고전 애호가들이 다양한 수준의 복제품들을 보수, 복원하는 기준이자 근거로 작용했다. 그렇지만 19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고전 고고학의 발전과 더불어서 고대 그리스 미술의 실체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강조되자 이러한 복제품들은 마치 “다음 층으로 도달한 다음에 버려지는 사다리와 같이” 여겨지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 동안 강도 높은 보수작업이 이루어진 고대 조각품들은 유럽의 유서 깊은 박물관들에서도 복도나 수장고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고전 미술사학의 성장에 기여한 역할만큼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이들을 통해서 근세 서양 사회는 고대 그리스에 대한 애정을 지속적으로 키워 나갔으며, 덕분에 현재 고전 고고학과 미술사학이 싹을 틔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근세 고전주의와 신고전주의의 껍질 속에서 고전 고대의 실체가 다시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흐름을 대표하는 두 사례는 고전 수사학의 전통을 근세 서양미술사학의 시대 구분 기준으로 발전시킨 요한 요아힘 빙켈만, 그리고 헬레니즘과 로마 복제품을 통해서 아케익기와 고전기 그리스 조각 양식을 역추적했던 아돌프 푸르트뱅글러이다. 이들의 학술적 성과와 방법론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고전 그리스의 실체와 허상으로 형성된 병렬적인 고전 미술사/고고학의 구조를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헬라스, 헬레니즘, 로마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자의식을 강하게 느끼는 것은 국내에 있을 때보다 국외에 있을 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 문화를 더욱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은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아테네 사회가 아니라 그 경계선 상에 머물러 있었던 마케도니아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던 고전기 후반과 헬레니즘 초기의 공공 조형물들에서는 고전기 아테네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과 선전을 통해서 과거 ‘이방인(바르바로스)’으로 취급받았던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세계의 적자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헬라스성을 정치적 헤게모니의 도구로 활용했던 대(大) 알렉산드로스와 후계자들의 전략은 20세기 발칸 반도에서 다시 한 번 되풀이된 바 있거니와, ‘헬레니즘’의 개념을 제시했던 현대 서구 역사학자들의 시각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기원전 31년의 악티움 해전을 기점으로 헬레니즘 세계는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로마 제국의 경계선 안으로 완벽하게 흡수되었다. 그러나 고대 헬라스의 전통은 철학과 문학, 그리고 조형예술 분야에서 로마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고전기 미술의 이상화된 표현 양식과 알레고리적인 도상들은 로마 황실의 공식적인 기념 건축물과 미술 작품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먼저 비트루비우스의 건축론과 동시대 주거 건축을 중심으로 해서 공화정 말기부터 제정 초기까지 로마 귀족 사회가 그리스 본토와 헬레니즘 왕국들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는 방식을 살펴보고, 다음으로는 동서 로마 제국의 교차로이자 국제도시였던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의 사례를 통해서 고전 고대의 유산이 비잔티움 시대와 포스트 비잔티움 시대를 거치는 동안 어떻게 취급되어 왔는지 고찰한다.
헬라스와 비잔티움의 충돌과 융합
15세기 이후 투르크 제국의 지배 기간 동안 그리스인들은 비잔티움 문화의 전통과 서유럽화된 고전 헬라스 문화유산 사이에서 지속적인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갈등이 증폭되어 나타난 사례는 17세기 크레타 함락을 전후해서 베네치아 사회로 진출했던 그리스 정교회 미술가들, 그리고 18세기 이후 본격화된 그리스 독립 운동 과정에서 서유럽 계몽주의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그리스 인문학자들과 이오니아 화파 예술가들, 그리고 19세기 초반 현대 국가로 재탄생한 이후 오토 왕정에서 새로운 아테네 건설에 주역이 되었던 서유럽 신고전주의자들의 유산과 이후 현대 그리스 미술가들의 문화적 자의식을 대표하는 ‘30년대 세대’ 화가들의 작업이다.
이들 가운데 먼저 근세 베네치아 사회 내에 건설되었던 그리스 이민자 조합의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는 포스트 비잔티움 시기 크레타 화파가 받아들인 서유럽 양식의 영향과 갈등, 그리고 비잔티움과 르네상스 전통 사이의 역학 관계를 보여 준다는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반면에 카스토리아 지역의 정교회 미술은 비잔티움의 전통이 후대로 가면서 민속화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데, 이 지역은 팔레올로구스 왕조 시대 비잔티움 제국의 세련된 양식으로부터 15세기 이후 크레타 화파의 영향을 거쳐서 17세기 이후 지역 공방들을 중심으로 번성한 민속 양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들이 공존하고 있다.
투르코크라티아(투르크인들의 통치) 동안 그리스인들은 헬라스로 일컬어지는 고전 고대와 점진적으로 단절하게 되었으며 서유럽 사회와도 심리적, 문화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와서 오토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서유럽 지식인들의 지원을 필요로 하게 되었을 때 서구 사회로부터 고전주의 문화를 역수입하게 되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파나기오티스 독사라스를 필두로 한 이오니아 화파 예술가들은 서유럽으로부터 역수입된 고전주의를 무기로 삼아서 그리스 미술을 ‘근대화’하고자 했으며, 계몽주의 인문주의자들은 비잔티움 그리스에 의해서 묻혀 있었던 고대 헬라스와의 연대감을 동시대 그리스인들과 서유럽인들에게 상기시키려고 노력했다.
과거의 역사는 현재를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다
이 책은 그리스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저자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현재 영어권에서 그리스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만들어졌던 조형문화 유산을 대상으로 해서 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스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확인된 분명한 사실은 이 문화권역의 실체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자의식과 역사 인식이 고전 고대와 중세 비잔티움이라는 두 시대적 층위, 그리고 서유럽 고전주의자들에 의해서 구축된 가상적 이미지와 포스트 비잔티움 이후 그리스 사회가 독자적으로 구축해 온 실체 사이의 간극에 의해서 끊임없이 도전을 받아 왔다는 점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그 어떤 집단도 그리스인들처럼 고대의 영광을 무겁게 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의 역사에 대한 자의식은 포스트 비잔티움 시대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는 토대였으며 현대 그리스인들의 독립과 국가 성장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해 왔다. 소위 ‘30년대 세대’로 불리는 20세기 초 현대 그리스 미술가들의 작업이 단적인 예이다. 근세 말 그리스인들의 정치적 독립에 중요한 지지 기반이 되었던 ‘서유럽적 그리스 성’에 대한 성찰과 자각은 현대 그리스인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들은 고대 헬라스와 근세 비잔티움의 문화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서유럽 화단과 구별되는 그리스 미술의 독자적 성격을 키워 나간 주체로서 지금까지도 현대 그리스 미술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저자는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던 고전 고대로부터 현대 유럽 사회 내에서 신흥 독립국가로 재탄생하기까지 오랜 역사 가운데서도 시대적 전환기와 지정학적 교차점들을 포괄하려고 했다. 비록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그리스성의 총체적 실체를 온전히 규명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서양 문명이 시대적 전환기마다 그리스라는 촉매를 통해서 어떻게 문화적 정체성을 발전시켜 왔는지, 그리고 그리스인들이 자신의 역사를 개척하는 데 이러한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자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 왔는지, 그리스 문화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 작으나마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저 : 조은정
국립 목포대학교 미술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친 후 그리스 테살로니키 아리스토텔레스 대학교 역사와 고고학부에서 선원근법의 기원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Korean Painting: From Modern to Contemporary, 1945-1980s (Hollym, 2015), 『혼자 읽는 세계미술사 1, 2』(다산초당, 2015, 공저), 『서양미술사전』(미진사, 2015, 공저) 등의 저서와 『그리스 미술』(예경, 2004), 『로마 미술』(예경, 2004), 『상징과 비밀, 명화를 만나다』(예경, 2006) 등의 역서가 있다.
최근의 연구 논문으로는 「게인즈버러의 영상 상자와 18세기 광학 장치에 관한 연구」(조형교육, 2016), 「고전기 그리스 사회의 가족 개념과 이미지」(미술사학보, 2015), 「리시포스의 사례를 통해서 본 그리스 조각의 개인 양식과 논란들」(미술사학, 2014) 등이 있다.